權五石[* 안동권씨 족보에는 權五 '晳'으로 기재되어있다.] 1921~1971 1921년 [[일제강점기]] 시대에 경상남도 창원군 내서면(현 [[경상남도]] [[창원시|마산회원구]])에서 아버지 권영찬과 어머니 [[김해 허씨]] 사이에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일찍이 [[부산대학교/밀양캠퍼스|밀양공립농잠학교]]를 졸업하였고 일제강점기 말기 당시 창원군 [* 현재의 [[창원시|마산합포구]]] 서기로 근무한 바 있다. [[8.15 광복]] 후 [[남조선로동당]]에 가입했다. [[막걸리]]의 도수를 높이려고 [[메탄올]]을 넣어 [[이뭐병|친구와 마시다가]] [[다윈상|친구는 사망했으며 본인은 실명하였다.]]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른다의 현실버전-- [[6.25 전쟁]]때엔 경남 [[창원시|창원군]] 노동당 부위원장, 반동조사위원회 부위원장 겸 조사원을 하였다. 이 때 [[양민학살]]에 가담하여 적어도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01&aid=0000851523|11명의 무고한 양민을 죽이는데 가담하였다]]. 당시 권오석은 [[반동분자]], 즉 즉결처형할 대상을 골라내는 역할이었는데 눈이 먼 권오석은 아무것도 모르는 주민들을 모아다가 '''손을 만져보고 처형대상을 결정'''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학살 현장에 없었다는 주장도 있다. [[http://shindonga.donga.com/3/all/13/105340/4|신동아 보도 기사]] 이로 인해 체포되어 수감되었으나, 폐결핵 등 질병이 도져 1956년 집행정지가 내려진다. 이후 5년 동안 풀려나지만 1961년 다시 수감되어 10년을 마산 교도소에서 복역하다가 1971년 옥중 사망한다. 사망할 때까지 전향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비전향 장기수]]다. 이후 그의 시신은 [[창원시|마산합포구]] 고성터널 근처에 안장되었으며, [[참여정부]] 시절 확장 묘역이 조성되고 컨테이너 초소가 설치되었다. 이 과정에서 당시 피해자 유가족들의 항의가 있었다. 가족으로 배우자 박덕남(2017년 2월 사망)과의 사이에서 딸 권창좌, [[권양숙]], 권진애, 아들 권기문을 두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는 장인 어른이 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래서 [[제16대 대통령 선거|2002년 대선]] [[새천년민주당]] 경선에서 [[이인제]]측에게 빨갱이의 사위라는 공격을 받았지만 당시 노무현은 연설에서 인정할 것은 인정하면서도 '''"그럼 아내를 버리란 말입니까?"'''라고 대답, 오히려 좋은 이미지가 확대되고 동정론이 나오는 등 제대로 반격에 성공하고 결국 경선-대선에서 승리했다. [[분류:마산회원구 출신 인물]][[분류:1921년 출생]] [include(틀:문서 가져옴,title=권오석,version=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