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족 정보 | 이름 = 고희경 | 그림 = | 그림설명 = | 출생일 = {{출생일|1873|7|22}} | 출생지 = [[서울특별시]] | 사망일 = {{사망일과 나이|1934|2|27|1873|7|22}} | 사망지 = | 국적 = | 별칭 = | 학력 = | 경력 = | 직업 = | 작위 = [[자작]]([[조선귀족]])
[[백작]] 승작([[1920년]]) | 전임자 = [[고영희 (1849년)|고영희]] | 후임자 = [[고흥겸]] | 종교 = | 배우자 = | 상훈 = | 웹사이트 = }} '''고희경'''(高羲敬, [[1873년]] [[7월 22일]] ~ [[1934년]] [[2월 27일]])은 [[일제 강점기]]의 [[조선귀족]]이다. 본관은 [[제주 고씨|제주]]이며 본적은 경성부 통동이다. == 생애 == [[정미칠적]]과 [[경술국적]]에 포함되어 있는 정치인 [[고영희 (1849년)|고영희]]의 아들로,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1885년]] 개화파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미국인을 초빙하여 영어를 가르친 국내 최초의 근대식 공립 학교 [[육영공원]]을 졸업하고 [[1891년]] 진사가 되면서 관직에 나가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뛰어난 외국어 실력으로 외교 업무를, 이후에는 황실 관련 업무를 주로 담당했다. [[1902년]] [[이재각]]이 단장을 맡은 [[영국의 에드워드 7세]] 즉위 축하 사절단의 일원으로 영국에 다녀왔다. [[1906년]] [[예식원]] 부경(副卿)과 [[제도국]] 의정관, [[궁내부]]의 예식과장과 예식관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일본]] 황태자를 맞는 봉영위원(奉迎委員)을 지냈다. 같은해 [[시강원]]에서 일하면서 [[영친왕]]의 강제 일본 유학 때 배종했다.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에는 황실이 왕실로 격하되었고, 고희경은 [[이왕직]] 사무관으로 계속 왕실 관련 업무를 맡았다. 이 때문에 현재 남아 있는 [[대한제국 순종|순종]]의 가족 사진에 등장하기도 한다. 아버지 고영희가 [[1916년]] 사망하자 자작 작위를 물려받았다가 [[1920년]] 백작으로 승급했고, [[1926년]]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다. 고영희와 고희경 부자는 유일하게 2대에 거쳐 중추원 고문을 지낸 인물들이다. [[1935년]]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는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되어 있다. {{뉴스 인용 |저자 = 성강현 |제목 = ‘조선공로자명감’친일 조선인 3백53명 기록 - 현역 국회의원 2002년 발표한 친일명단 일치 상당수 |url = http://www.ilyosisa.co.kr/SUNDAY/SUN_0426/TM_0301.html |출판사 = 일요시사 |날짜 = 2004-03-18 |확인날짜 = 2008-04-17 |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080627191258/http://www.ilyosisa.co.kr/SUNDAY/SUN_0426/TM_0301.html |보존날짜 = 2008-06-27 |깨진링크 = 예 }}{{뉴스 인용 |저자 = 성강현 |제목 = 3백53명 중 2백56명 명단 |url = http://www.ilyosisa.co.kr/SUNDAY/SUN_0426/TM_0302.html |출판사 = 일요시사 |날짜 = 2004-03-18 |확인날짜 = 2008-04-17 |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080627191303/http://www.ilyosisa.co.kr/SUNDAY/SUN_0426/TM_0302.html |보존날짜 = 2008-06-27 |깨진링크 = 예 }} == 사후 ==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아버지 고영희와 함께 선정되었다. 두 명단에는 [[1934년]] [[6월 1일]] 그의 작위를 습작 받은 1934년 6월 1일~:《조선총독부관보》(1934.6.6.) [[고흥겸]]도 포함되어 있다.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는 고희경의 토지를 국가로 환수하기로 결정했고, {{뉴스 인용 |저자=이민정 |제목=재산 환수되는 친일파 9인은 누구? - 권중현·이완용 등 을사오적 중 일부 포함 |url=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407999 |출판사=오마이뉴스 |날짜=2007-05-02 |확인날짜=2008-04-13 }} [[11월 22일]] 제3차 재산환수 대상자를 결정하면서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 시행 이후 제3자에게 처분한 고희경의 재산까지 국가 귀속 결정을 내렸다. 11월 22일~: {{뉴스 인용 |저자 = 임은진 기자 |제목 = 왕족 이해승 등 친일파 재산 410억 국가귀속 - 이해승ㆍ이지용ㆍ유정수ㆍ고희경ㆍ민영휘ㆍ민병석ㆍ송병준ㆍ한창수 등 |url = http://www.yonhapnews.co.kr/politics/2007/11/22/0501000000AKR20071122087851004.HTML |출판사 = 연합뉴스 |날짜 = 2007-11-22 |확인날짜 = 2007-11-22 }}{{깨진 링크|url=http://www.yonhapnews.co.kr/politics/2007/11/22/0501000000AKR20071122087851004.HTML }} 이후, 2년 뒤인 [[2009년]]에 고희경의 후손들이 고희경의 재산들을 자진하여 반납하기로 하였다.[http://www.cbs.co.kr/nocut/show.asp?idx=1313193 선조 친일활동 인정, 재산 첫 자진반납] 노컷뉴스 2007년 [[12월 6일]]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도 선정되어 있다. == 같이 보기 == * [[조선총독부 중추원]] * [[이왕직]] * [[고영희 (1849년)|고영희]] == 참고자료 == * {{서적 인용 |저자=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제목=2007년도 조사보고서 II - 친일반민족행위결정이유서|연도=2007 |발행월=12 |id=발간등록번호 11-1560010-0000002-10 |출판위치=서울 |쪽=492~405쪽 |장=고희경 |장url=http://www.pcic.go.kr:8088/pcic/UserFiles/File/2007JOSA/SUJAKSUBSAK/31-GHK.pdf }} == 각주 == {{각주}} [[분류:1873년 태어남]][[분류:1934년 죽음]][[분류:대한제국의 관료]][[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조선백작]][[분류:조선자작]][[분류:조선총독부 중추원 간부]][[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제주 고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