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주 정보 |이름 = 신라 경순왕 |원래 이름 = 新羅 敬順王 |본명=김부(金傅) |다른 이름=정승공(政承公) |그림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0/0c/King_Kyungsoon_of_Silla.jpg |설명 = 신라 경순왕 영정 |타이틀 = [[신라의 역대 국왕|신라의 제56대 국왕]] |재위 = [[927년]] ~ [[935년]] |출생일 = ? |사망일 = [[978년]] 4월 4일 ([[고려 경종]] 3년) |매장지 = [[경기도]] [[장단군]] 장단면(현 연천군 장남면) |종교 = [[불교]] |섭정 = [[상대등|상대등 김웅렴 공]]
[[마의태자|태자 김공]] |배우자 = [[죽방부인]](정실 왕후)
낙랑공주 왕씨(제1후비)
[[개성 왕씨|왕씨]] 부인(제2후비) |자녀 = 슬하 8남 3녀
(장남 [[마의태자|태자]])
(차남 [[김덕지|김황(굉,나주김씨)]]) |부친 = 이찬 [[김효종 (신라)|김효종]] |모후 = 계아태후 |왕가 = [[신라 왕조]] |왕조 = [[신라]] |시호 = '''경순''' }} '''경순왕'''(敬順王. ? ~ [[978년]])은 [[신라]]의 제56대 군주(재위: [[927년]] ~ [[935년]])이다. 성은 [[김 (성씨)|김]](金)이고, 이름은 부(傅)이며, 시호는 경순(敬順)이다.[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970495 장례 행렬이 고랑포 나루를 건너지 못하고 - 오마이뉴스] 2008년 08월 29일자 [[신라|신라 김씨]](또는 [[신라|계림 김씨]]) 시조 대보공 [[김알지]](金閼智)의 27세손이며, [[문성왕]]의 5세손이다. 아버지는 신흥대왕(神興大王)에 추존(追尊)된 [[김효종 (신라)|효종]](孝宗)이며, 어머니는 [[헌강왕]]의 딸인 계아태후(桂娥太后)이다. 왕후(王后)는 [[죽방부인]](竹房夫人)으로 슬하에 두왕자를 두었다. 첫째가 [[마의태자|태자]](太子)이고, 둘째가 김황(굉,나주김씨)왕자이다. 그는 [[신라]] 왕족으로 [[경명왕]]과 [[경애왕]]의 친척 동생이다. 제54대 [[경명왕]] 때부터 고려 세력에 의지해 후백제를 견제하려는 정책을 펼쳐왔는데, [[924년]] 제55대 왕에 등극한 [[경애왕]]도 형 [[경명왕]]의 친 고려 정책을 이어받아 [[927년]] 음력 정월에 고려가 후백제를 공격하자 군사를 보내 도왔다. 그러자 [[927년]] 음력 11월 후백제 견훤이 신라의 수도 금성을 기습하여 [[경애왕]]과 왕비를 죽이고, 그의 친척 동생인 경순왕을 왕으로 세워 왕위에 올라 [[927년]]부터 [[935년]]까지 재위하였다. [[935년]] 11월 그는 재위 8년만에 신라의 천년 사직을 고려에 양국(讓國)하고, [[고려]] 조정으로부터 상주국(上柱國) 낙랑왕(樂浪王)에 봉군되었다. 또 정승공(政承公)에 봉해지고 [[경주시|경주]]를 식읍으로 하사받았는데 그 품위가 [[태자]](太子)보다 높았다. 신란궁(神鸞宮)을 하사 받고, [[경주시|금성]]의 [[사심관]]에 임명되어 [[고려|고려시대]] 사심관 제도의 시초가 되었다. 그의 능은 [[신라]] 왕릉 중에 유일하게 경주가 아닌 [[경기도]]에 있다.[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184186 DMZ의 봄을 보러 가다 (2) - 오마이뉴스] == 본관 == 《[[삼국사기]]》에 의하면 65년([[탈해왕]] 9) 3월 왕이 [[금성]] 서쪽 [[시림]]에서 닭우는 소리를 듣고 날이 밝자 호공을 보내어 살펴보게 하였더니 금색의 작은 궤짝이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었는데 흰 닭이 그 밑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보고하자 왕은 사람을 보내어 금궤를 가져온 후 뚜껑을 열어보니, 작은 사내아이가 들어 있었다. [[탈해 이사금|탈해왕]]은 기뻐하여 “이 어찌 하늘이 나에게 아들을 보내 준 것이 아니라 하겠는가”하며 거두어 기르니 아이는 자라면서 총명하고 지략이 뛰어나 이름을 [[알지]](閼智)라 하고, 금궤에서 나왔다고 하여 성을 김(金)으로 하사하였으며, 시림(始林)을 [[계림]](鷄林)으로 고쳐 나라 이름을 삼았다. '''신라 김씨'''(新羅 金氏){또는 '''계림 김씨'''(鷄林 金氏)} 시조 [[김알지]]의 7대손인 미추왕(신라 13대)에 이르러 비로서 왕위에 오르게 됨으로써,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알지의 28세손)이 [[935년]] 11월 [[고려 태조]] 왕건에게 나라를 손국하기 까지 38명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 생애 == === 생애 초기 === 경순왕은 이름이 부(傅)이며, [[신라 문성왕]](文聖王)의 5대손으로, 아버지는 [[대아찬]](大阿飡)을 지낸 [[김효종 (신라)|김효종]]이고, 어머니는 [[신라 헌강왕]]의 딸인 계아태후이다.성은 김(金)씨이다. 출처: 한국고대인명사전 - 헌강왕(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573670&cid=42953&categoryId=42953) [[927년]]부터 [[935년]]까지 재위하였다. 가계는 [[신라 문성왕]](文聖王)-상대등 '김안'(金安)-각간 '김민공'(金敏恭)-추존 의흥왕 '김실홍'(金實虹. 일명 仁慶)-추존 신흥왕 [[김효종 (신라)|김효종]](金孝宗)-경순왕(敬順王)으로 이어진다. 왕후(王后)는 [[죽방부인]](竹房夫人)으로 슬하에 두아들을 두었다. 첫째가 [[마의태자|태자]](太子)이고, 둘째가 김황(굉,나주김씨)왕자이다. === 신라 왕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ko/thumb/e/e9/Korea_south_silla_poseokjeong.jpg/240px-Korea_south_silla_poseokjeong.jpg 포석정 [[927년]] [[신라]]를 침공한 [[견훤]]에 의해 [[경애왕]]이 강제적으로 목숨을 끊게 되고, 그가 신라 56대 왕위에 올랐다. 그는 본래 왕위 계승 위치에 있지 않았으나, [[927년]] [[경애왕]]이 갑작스럽게 피살 당하면서 왕위에 올랐다. 즉위 배경은 미상이며 왕위에 오를 당시 [[경애왕]]의 자녀들이 있었는지, [[화백 회의]] 추대를 받아서 즉위 했는지에 대한 진위 여부는 알려진 바가 없다.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6/6b/King_Kyungsoon_of_Silla_2.jpg/150px-King_Kyungsoon_of_Silla_2.jpg 경순왕 영정 (경남도 유형문화재 제474호) 그는 즉위 초 아버지 [[대아찬]](大阿飡)을 신흥왕(神興王)으로, 할아버지 각간(角干) 김실홍을 의흥왕(懿興王)으로 각각 추존하였다. 재위시에 국력이 쇠퇴하고 특히 여러 차례에 걸친 [[후백제]]의 침공과 약탈로 국가의 기능이 완전히 마비되었다. 따라서 그의 정책은 난폭한 [[견훤]]보다 오히려 [[왕건]]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http://koreandb.nate.com/history/people/detail?sn=128 경순왕:네이트 한국학] [[931년]] 고려 [[고려 태조|왕건]]의 알현이 있었는데, 수십일을 머물면서 왕건은 부하 군병들에게 정숙하여 조금도 범법하지 못하게 하니, 왕경의 사녀(士女)들은 전번 견훤이 왔을 때에는 승냥이와 이리를 만난 것 같았으나, 이번 [[고려 태조|왕건]]이 왔을 때에는 부모를 만난 것 같다고 하였다. [[고려 태조|왕건]] 일행이 [[경주]]를 방문한 어느 날에는 그는 [[고려 태조|왕건]]의 손을 붙잡고 [[견훤]] 때문에 살 수가 없음을 하소연하며 통곡하기도 했다. === 고려 귀순 및 멸망 === [[935년]] 10월에 경순왕은 민심이 신흥 [[고려]]로 기울어짐에 따라, 군신회의를 소집하여 천년 사직을 [[고려]]에 양국(讓國) 하기로 결심하자, [[마의태자|태자]]와 막내아들 [[김덕지]] 및 이순유(李純由) 등이 불가함을 극력 간(諫)하였으나, 경순왕은 이들의 반대를 뒤로하고 시랑(侍郞) 김봉휴(金封休)에게 국서를 보내 [[고려 왕건]]에게 항복을 청하였다. 일설에는 어전에서 자살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이에 두왕자는 양국(讓國) 반대의 뜻을 이루지 못하자, 통곡하며 왕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그 길로 개골산(皆骨山.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이후 [[마의태자|태자]](太子)는 바위 아래에 집을 짓고 삼베옷을 입고 풀을 캐어 먹다가 일생을 마쳤는데 후대에 [[마의태자]](麻衣太子)라 부르며, 둘째아들 황(굉,나주김씨) 왕자는 [[화엄종]]에 귀의하여 중이 되어 법수사(法水寺)·[[해인사]](海印寺)에 주석(駐錫)하며 망국의 한을 달랬는데 법명을 범공(梵空)이라 한다. [[935년]] 11월 경순왕이 시랑(侍郞) 김봉휴(金封休)시켜 항복 국서를 [[고려 태조]]에게 받치니 천년([[기원전 57년]] ~ [[935년]])의 [[신라]](新羅)는 멸망했다. === 고려 귀순 후 === [[935년]] 11월 [[고려 태조]]는 태상(太相) 왕철(王鐵) 등을 보내 경순왕을 맞이하도록 하였다. 경순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서라벌을 출발하여 고려에게 가는데 향나무 수레와 구슬로 장식한 말이 30여 리에 이어지니, 길이 막히고 구경하는 사람들이 담장을 친 것과 같았다. [[고려 태조|태조 왕건]]이 교외에 나와 경순왕을 영접하여 위로하며, 궁궐 동쪽의 제일 좋은 구역(지금의 정승원(正承院))을 내주어 머물도록 하였다. 또 [[고려 태조|태조 왕건]]은 장녀인 [[낙랑공주 (고려)|낙랑공주]] 왕씨를 경순왕의 아내로 삼게 하였는데, 경순왕이 자기 나라를 버리고 남의 나라에 와서 살기 때문에 이름을 고쳐 신란공주(神鸞公主)라 하고, 시호는 효목(孝穆)이라 했다. 아홉째 딸인 '부인 왕씨'(夫人 王氏)도 아내로 삼게 하였다. [[935년]] 12월 경순왕을 정승공(正丞公) 상주국(上柱國) 낙랑왕(樂浪王)에 봉하고 위계를 태자(太子)의 위에 두고 녹봉으로 1,000섬을 주었다. 또 왕을 모시고 온 관원과 장수들도 모두 다 관직을 주어 등용시켰다. 신라를 [[경주]]로 고치고 식읍으로 삼도록 하고, [[경주]]의 [[사심관]]에 임명하여 [[고려]]시대 사심관 제도의 시초가 되었다. [[고려 태조|태조 왕건]]도 경순왕의 백부 김억렴(金億廉)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는데, 그녀가 제5왕후인 [[신성왕후]] 김씨이다. 슬하에 왕욱(王郁)을 두었으며, 왕욱(王郁)의 아들이 고려 제8대 왕 [[고려 현종]]이다. 이후 경순왕은 첫째딸을 [[고려 태조]]의 손자인 [[고려 경종|경종]]에게 출가시켰는데, 그녀가 [[헌숙왕후]](獻肅王后) 김씨이다. 이 일로 [[고려 경종|경종]]은 그를 특별히 배려하여 상보령(尙父令)으로 삼고 식읍과 녹봉을 더해 주었다. 그는 [[고려 태조]]부터 [[고려 혜종]]·[[고려 정종|정종]]·[[고려 광종|광종]]·[[고려 경종|경종]]대까지 5대에 걸쳐 살았으며, [[고려 태조|태조 왕건]]이 죽은 후에도 왕 다음으로 높은 존재로 인식되고 그 영향력이 컸다. [[978년]](고려 경종 3) 태평흥국(太平興國) 3년인 [[무인년]] [[4월 4일]]에 붕어(崩御)하였다. == 사후 == {{참고|연천 경순왕릉}}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b/be/%EC%8B%A0%EB%9D%BC_%EA%B2%BD%EC%88%9C%EC%99%95_%EC%B4%88%EC%83%81_%EC%B4%88%EB%B3%B8_1904.jpg/180px-%EC%8B%A0%EB%9D%BC_%EA%B2%BD%EC%88%9C%EC%99%95_%EC%B4%88%EC%83%81_%EC%B4%88%EB%B3%B8_1904.jpg 1904년작 경순왕 영정 초본 [[978년]](고려 경종 3) 경순(敬順)이라 시호를 올리고, 왕으로 예우하여 능을 [[경기도]] [[장단군]] 장단면(현 연천군 장남면) 남쪽 고랑포 8리 계좌 언덕에 장사 지냈다. 그가 죽자 그의 시신을 다른 [[신라]]의 왕릉이 있는 [[경주]]로 운구하려 하였으나, [[고려]] 왕실에서 왕의 영구는 도성 밖 100리를 넘을 수 없다고 하며 반대함으로써 [[임진강]]을 건너지 못하고 현재의 묘자리에 안장되었다. 이후 그의 묘소는 [[임진왜란]] 이후 실전되었다가 [[1747년]](영조 23) 다시 되찾아 정비하였다. 경북 경주 황남동의 숭혜전, 하동 청암면의 경천묘 등에 제향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1746년]](영조 22) 10월 14일 [[경기도]](京畿道) 장단(長湍. 현 연천군 장남면)에서 경순왕의 지석(誌石) 및 신도비(神道碑)가 나왔음을 아뢰는 동지(同知) 김응호(金應豪)의 상소가 있고, 그 후속 조치로 [[1747년]] 4월 20일 경순왕의 묘를 수치(修治)하고 묘비를 다시 세웠다. 그리고 [[1748년]](영조 24) 1월 29일에 고려 왕릉의 예에 준하여 경순왕릉에도 수총군(守塚軍) 5명을 두어 지키게 하였다. 이렇게 하여 현재의 경순왕릉 모습을 유지 보존할 수 있었다. 경순왕릉비는 [[1748년]](영조 24) [[연천 경순왕릉|경순왕릉]] 있근 경기도 연천군 장단면 고랑포 마을 민가에서 후손 [[경주 김씨]] 김빈(金礗)과 김굉(金硡) 등이 발견한 것으로, 비문 내용은 10여자 정도 남아 있는데 자연풍화 등으로 많이 훼손되어 거의 알아 볼 수 없다. 이후 한국전쟁 당시 경순왕릉에서 300m 떨어진 고랑포리 시가 지역에 방치되어 오던 것을, [[1973년]] 고랑포 초등학교로 이전되었다가, [[1987년]] 경순왕릉 정화사업에 따라 현 위치로 옮겨지게 되었다. 비석의 재질은 대리석으로 크기는 높이 132cm, 너비 65cm, 두께 16cm 이며, 상태는 1면만 겨우 남아 10여개의 문자만 판독되고, 내용은 거의 알 수 없다. == 가족 관계 == * 아버지: 신흥왕 [[김효종 (신라)|김효종]](金孝宗) * 어머니: 계아태후(桂娥太后) - [[헌강왕]]의 딸 ** 왕비: [[죽방부인]](竹房夫人) ***첫째왕자: 사실명(史失名), 문헌에 [[마의태자|태자]](太子), [또는 김일(金鎰)], [[부안 김씨]] 시조 ***둘째왕자: 사실명(史失名), 문헌에 김황(굉,나주김씨), 승명 범공, 나주김씨 ***셋째왕자: -(추정) 일부 문헌에 영분공(永棼公) 김명종(金鳴鍾), [[경주 김씨|경주김씨 영분공파]] 시조 ** 제1후비: [[낙랑공주 (고려)|낙랑공주]](樂浪公主) 왕씨(王氏), 일명 [[낙랑공주 (고려)|안정숙의공주]](安貞淑義公主) - [[고려 태조|태조 왕건]]의 첫째 딸 *** 1남: 김은열(金殷說), 고려조 경주군(慶州君), [[경주 김씨|경주김씨 은열공파]] 시조부왕 경순왕의 식읍(食邑)을 습봉함 *** 2남: 김석(金錫), 고려조 의성군(義城君), [[의성 김씨]] 시조일부 문헌에 경순왕 제4자 또는 제5자로 기록됨 *** 3남: 김건(金鍵), 고려조 강릉군(江陵君), [[강릉 김씨|(후)강릉김씨]] 시조후손이 홍주 김씨를 이루고 있다. *** 4남: 김선(金鐥), 고려조 언양군(彦陽君), [[언양 김씨]] 시조 *** 5남: 김추(金錘), 고려조 일선군(一善君), [[선산 김씨]] 시조 *** 1녀: [[고려 경종]] 왕주(王伷)에게 출가, [[헌숙왕후]](獻肅王后) 김씨일설에 [[죽방부인]] 소생이라 하나, 고려 경종(955~981)의 연대로 보아 [[낙랑공주 (고려)|낙랑공주]] 소생이 타당함 *** 2녀: [[장수 황씨]] 황경(黃瓊)에게 출가 *** 3녀: [[경주 이씨]] [[이금서]](李金書)에게 출가 ** 제2후비: '부인 왕씨'(夫人 王氏) - [[고려 태조|태조 왕건]]의 아홉째 딸[[고려 태조|태조 왕건]]과 [[성무부인|성무부인 박씨]] 소생의 딸, 외조부 호족 박지윤(朴智胤) === 자녀에 대해 === ==== 정설(定說) - 2왕자 · 1녀설 ==== 경순왕 가계에 대해 《[[삼국사기]]》·《[[삼국유사]]》·《동국여지승람》에 왕비는 [[죽방부인]]으로 슬하에 두왕자를 두었는데 이름은 사실명(史失名)이라 한다. 이들 왕자는 [[935년]] 10월 신라의 고려 항복에 대해 불가함을 극력 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개골산(皆骨山.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이후 [[마의태자|태자]](太子)는 바위 아래에 집을 짓고 마의(麻衣. 삼베옷)를 입고 풀을 캐어 먹다가 일생을 마쳤다 하여 후대에 [[마의태자]](麻衣太子)라 부르며, 막내아들은 [[화엄종]]에 귀의하여 중이 되어 법수사(法水寺)·[[해인사]](海印寺)에 주석(駐錫)하며 망국의 한을 달랬는데 법명을 범공(梵空)이라 한다. 고려에 항복 후 경순왕은 첫째딸을 [[고려 태조]]의 손자인 [[고려 경종|경종]]에게 출가시켰는데, 그녀가 [[헌숙왕후]](獻肅王后) 김씨이다. 이 일로 인하여 그는 정승공(正丞公) 상보령(尙父令)에 봉해지고 식읍과 녹봉을 더 받았다. == 경순왕이 등장한 작품 == === TV 드라마 === * 《[[태조 왕건 (드라마)|태조 왕건]]》([[KBS]], [[2000년]]~[[2002년]], 배우:[[신귀식]]) * 《[[제국의 아침]]》([[KBS]], [[2002년]]~[[2003년]], 배우:[[이도련]]) == 기타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a/aa/%EC%8B%A0%EB%9D%BC_%EA%B2%BD%EC%88%9C%EC%99%95_%EC%B4%88%EC%83%81_1794.jpg 경순왕 영정 (1794년, 이명기작) 경순왕의 어진을 처음 제작한 것은 [[통일 신라]]가 멸망한 직후인 고려 초였다.[http://news.donga.com/Culture/3/07/20100602/28785354/1 ‘비운의 경순왕’ 초상화 첫 공개] 동아일보 2010년 06월 02일자 경순왕을 추모하기 위해 그린 이 어진은 강원 원주시 고자암에 봉안해 놓았다. 그 후 원본은 사라졌지만 조선시대에 이모한 작품 5점이 전하고 있다. 5점은 [[1677년]](숙종 2년) 강원 원주의 고자암에서 제작한 것, [[1749년]] 경북 영천 은해사 상용암에서 그린 것, [[1794년]] 초상화가 이명기가 은해사본을 보고 다시 그린 것, [[1904년]](광무 8년) [[승려]] 출신 [[대한제국]]의 화가 이진춘이 이명기 본을 보고 다시 그린 것과, 이진춘 본의 초본 등이다. 이들 어진 5점은 경순왕 사당인 경북 경주시 숭혜전 창고에 방치돼 오다 2007년 그 존재가 처음 확인됐다. 이후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 위탁 보관해 왔지만 그 전모는 알려지지 않았다. [[대한제국]] 시절 그려져 [[경상남도]] [[하동군]] 청암면 평촌리 산 107-1 경천묘에 봉안중인 '경순왕 어진'은 [[2008년]] 경남도 유형문화재 제474호로 지정되었다.[http://www.gnmaeil.com/news/articleView.html?idxno=116829 경천묘 ‘경순왕 어진’- 경남도유형문화재 지정] 경남매일 2008년 12월 08일 == 참고 == * [[고려]] ** [[고려 태조|태조]] ([[918년]] - [[943년]]) * [[후백제]] ** [[견훤]] ([[900년]] - [[935년]]) * [[후발해]] ** 대정현 ([[926년]] - [[940년]]) == 각주 == == 외부 링크 == {{위키공용분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631290 신라 경순왕릉과 회암사지를 다녀와서 - 오마이뉴스] 2011년 09월 24일자 * [http://koreandb.nate.com/history/people/detail?sn=128 신라 경순왕:네이트 한국학] * [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3TSR_A9999_1_0000320 경순왕: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 * [http://100.naver.com/100.nhn?docid=10575 경순왕] {{전임후임 |전임자 = [[경애왕]] |후임자 = (왕조 멸망)
([[고려 태조]]) |대수 = 56 |직책 = [[신라]] [[신라의 역대 국왕|국왕]] |임기 = [[927년]] - [[935년]] |앞이름 = 전 대 |뒤이름 = 후 대 }} {{신라의 왕}} {{글로벌세계대백과|제목=고려의 통일}} [[분류:생년 미상|경순왕]][[분류:978년 죽음|경순왕]][[분류:신라의 왕|경순왕]][[분류:고려의 귀족|경순왕]][[분류:고려의 문신]][[분류:불교도 군주|김부]][[분류:고려의 정치인]][[분류:경주 김씨]][[분류:경상북도 출신 인물]][[분류:병사한 사람]][[분류:고려 태조]][[분류:고려의 불교 신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