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택'''(姜鋌澤, [[1907년]] [[11월 1일]] ~ ?, [[울산광역시|울산]])은 [[대한민국]]의 농업경제학자로 [[대한민국 농림부|농림부]] 차관을 지냈다. == 출생 == 강정택은 대한제국 울산병영 부위(대대장급)였던 강영수와 어머니는 천석꾼 아전 집안의 딸 이유송의 아들로 울산읍 신정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강영수는 군대 해산으로 실직하고 망국의 울분 속에 강정택이 12세 되던 해 사망하였다. 강정택은 울산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직후 금융조합에 사환으로 들어가 약 1년간 일하였다. 이후 [[1922년]] 4월 대구고보에 수석 입학하여 [[1927년]] 졸업하고 동경 1고에 진학하였다.[http://aflnews.co.kr/aflnews/news/news_contents.asp?ref=730&news_code=2010030401101&c_code=0106 강정택>농지개혁의 주역, 자유 대한을 살리다 (2)농정학자의 길을 선택한 울산 천재의 인생행로], 농수축산신문 == 도쿄 유학 == 그는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로 불리었던 일본 재계의 거물 [[시부사와 에이이치]]와 그의 손자 케이조의 후원으로 동경대학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1927년 동경 1고에 입학하여 [[1930년]]에 졸업하였고 동경대학교 농학부 농업경제학과에 입학하여 1933년 졸업하였다. 그는 대학에서 [[나스 시로시]]로부터 농정학을 공부하고, 졸업 후 농정학 교실의 연구 조교로 임용되었다가 전임 연구원로 승진하여 식민지 조선의 농촌에 대하여 연구하고, [[1943년]] [[동아농업연구소]]의 촉탁으로 '조선의 농경작업 관행 및 노동공정의 조사연구'를 하기 위해 귀국하였다. == 농정이론 활동 == [[1945년]] 12월, 그는 미 군정청에 의해 경성대학의 법문학부 경제학과 농업정책 담당 교수로 임명되었으나 대학과 전문대학의 1대1 통합에 반대하며 반년만에 사직하고 [[조선 사회과학 연구소]]를 설립하여 활동하였는데, 강정택은 [[민주주의민족전선]]의 농업문제연구위원회를 맡아 북한식의 토지개혁을 주장하였다. 이후 강정택은 제2대 농림부 차관으로 임명되어 농지개혁안을 입법하였으나 관철되지 못하자 사임한 후 농사시험장 고문으로 있으면서 [[한국경제연구소]]를 세워 농업정책을 연구하였다. 한국전쟁 때에 원서동의 동서 집 마루 밑에 숨어 있다가 [[1950년]] 7월 2일 책을 가지러 제기동 자택에 들렀을 때 인민군 두 명에게 연행되어 납북되었다. == 농지 개혁 == 강정택은 농림부 차관으로 취임 후 한 달여 만에 [[농지개혁]]을 위한 실무초안을 만들어 1948년 11월 22일에 공표하였다. 주 내용은 '호당 농지소유 상한선 2정보, 지주에 대한 보상은 연평균 생산량의 150%를 3년 거치, 10년 분할상환으로 하고 보상증권을 발행, 농민은 120%를 연 20%씩 6년간 현물상환, 차액은 정부 부담'이었다. 이 초안은 당시 좌익이 주장했던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주장을 견제하면서 내용상으로는 좌익의 건국준비위원회의 안이나 1정보 상한의 일본농지법보다 더욱 혁신적이라는 평을 받았다. == 관련 서적 == 이문웅 서울대 명예교수는 2008년 강정택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 논문집 《식민지 조선의 농촌사회와 농업경제》를 엮어 내었다.최영창,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8101401032530074002 6·25때 납북된 강정택 前 농림부 차관을 아십니까], [[문화일보]] == 가족 == 그의 여동생은 이수성 국무총리의 어머니인 강금복과 울산 남구의회 윤원도 의원의 어머니 강소복이다. == 각주 == {{전임후임| |대수 = 2 |직책 = [[대한민국 농림부|농림부 차관]] |임기 = [[1948년]] [[9월 30일]] ~ [[1949년]] [[3월 24일]] }} [[분류:1907년 태어남]][[분류:몰년 미상]][[분류:20세기 죽음]][[분류:대한민국의 경제학자]][[분류:대한민국의 농림부 차관]][[분류:도쿄 대학 동문]][[분류:울산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납북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