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 [[분류:한국전쟁/군인]] [[분류:조선인민군 총참모장]] [[분류:북한의 정치인]] [[분류:1918년 출생]] [[분류:상주시 출신 인물]] [[분류:1950년 사망]]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c/ce/General_Kang_Gun.png 강건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8/82/%EA%B9%80%EC%9D%BC%EC%84%B1_%EC%88%98%EB%A0%B9_%EC%B5%9C%EC%9A%A9%EA%B1%B4_%EA%B9%80%EC%B1%85_%EA%B9%80%EC%9D%BC_%EA%B0%95%EA%B1%B4.jpg/200px-%EA%B9%80%EC%9D%BC%EC%84%B1_%EC%88%98%EB%A0%B9_%EC%B5%9C%EC%9A%A9%EA%B1%B4_%EA%B9%80%EC%B1%85_%EA%B9%80%EC%9D%BC_%EA%B0%95%EA%B1%B4.jpg 평양에서 생산된 최초의 따발총을 수여받은 최용건, 김책, 김일, 강건 姜健 1918년 6월 23일 ~ 1950년 9월 8일 [[북한]]의 정치인이자, 군인. 그리고 독립운동가이다. 본명은 강신태(姜信泰)이다. 상당수의 혁명 1세대 정치인, 군인들이 북한쪽 출생인데 반해 강건은 혁명 1세대 중에서는 흔치 않은 남한 쪽([[경상북도]] [[상주시|상주군]]) 출생.[* 2008년에 사망한 북한 전 부주석인 박성철도 경상북도 [[경주시]] 출생.] 어린 시절에 만주로 이주한 후 1933년 항일유격대에 입대했고, 어학 실력과 유격전에서 남다른 재능을 보여 쾌속 승진했다. 1935년에 편성된 [[동북항일연군]]에서 저우바오중(주보중)의 부하로 활동했고, 그 과정에서 [[김일성]]을 만나 그의 최측근이 되었다. 1930년대 후반에 [[일본군]]의 대토벌로 항일연군에 위기가 닥치자 김일성과 함께 [[소련]] 연해주로 피신했다. 1945년 해방 후 대다수의 항일빨치산 동료들이 입북할 때 강건은 [[최광]], 김창봉, 임철수 등을 이끌고 옌벤으로 가서 1년 정도 활동하다가 귀국 후 [[조선인민군]] 창군 작업에 참여했다. 1948년 2월 조선인민군 총참모장, 1948년 3월 북조선노동당 중앙위원, 1948년 8월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1948년 9월 민족보위성 부상(국방부 차관에 해당하는 직책) 등 각종 직책을 역임했고 1949년에는 국기훈장 제1급을 수훈했다. 1950년 6월 [[6.25 전쟁]]이 발발하자 총참모장으로 북한군을 이끌다가 9월 8일 고향에서 멀지 않은 [[경상북도]] [[안동시]]에서 [[지뢰]] 폭발 사고로 사망했다. 장례식에서는 [[김일성]]과 [[박헌영]]이 직접 관을 운구했고,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았다. 6.25 전쟁 당시 전과를 올린 북한군 2보병사단이 [[근위대|근위]] 칭호를 받고, 강건을 기리는 목적으로 '근위 강건 제 2 보병사단'이라는 이름으로 개칭되었고, 평양의 강건종합군관학교는 본래 제1군관학교였다가 사후 그의 이름을 따 개칭되었다. 또, [[황해북도]] [[사리원]]에는 강건대학과 부속 병원인 강건대학병원이 있다. '강건거리'라는 지명도 생겼다고 한다. [include(틀:문서 가져옴,title=강건,version=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