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도, 또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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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박한 땅에 발을 딛는다. 이전엔 아스팔트였을, 거대한 강철의 말이 힘차게 달렸을 그 옛 가도에 묵직한 부츠가 착지하자 켜켜히 쌓인 먼지와 삭아버린 아스팔트가 산산히 부서져 인상깊은 자국을 그 자리에 남겼다. 한걸음 한걸음 쉬지 않고 걸어왔기에 방랑자의 뒤에는 방랑자의 발자국만이 한없이 늘어져 있었다.

비라도 한차례 시원하게 내려줬다면 좋겠지만 하늘을 지독히도 뒤덮은 구름은 인상을 한없이 찌뿌리기만 할뿐 별써 몇달째 그 자리에서 미동도 하고 있지 않았다. 방랑자는 그것이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을 무심코 하고 있었는데, 비가 오지 않는한, 누군가 이 땅을 디디고 섰다면 그 흔적이 분몀 남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막연한 희망이라는건 알고 있었다. 이 땅에 다다른 이후로 그런 흔적일랑 본적 없었다는 경험이 그걸 말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방랑자는 그 사실을 무시하고 있었다. 다른 수많은 사실들처럼 말이다. 예를 들자면, 이 땅에서 풍기는 심각한 악취처럼. 이전에 주운, 매우 뛰어난 성능을 보여주고 있는 방독면조차도 그 악취는 걸러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방랑자는 그 냄새와 함께 살아야했다. '피하지 못하면 즐겨라'. 방랑자가 좋아하는 문구는 아니었다. 아니, 방랑자가 좋아하는 문구의 순위를 매기자면 밑에서 세는게 빠를 문구였다. 하지만 방랑자는 그 문구를 피할수 없었다. 때문에 적어도 방랑자는 피할수 없다면 잊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방랑자로써도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 있었다. 잊어서는 안되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바로 방랑자가 총을 들고 있지 않은 왼손에서 든 작은 기계에서 나는, 아주 약하고 낮은 소리로 울리는 경보음이었다. 빕. 빕. 10초의 간격을 두고 울리는 그 경보음을 방랑자는 결코 잊지 않았다. 이곳에 온 이유가 애초에 이것 때문이었으니. 그리고 마침내 그 경보음이, 매우 오랜 시간을 그 소리와 함께하며 살아온 사람이 아니고서야 눈치챌 수 없을 정도로 아주 미묘하게 커졌을때, 방랑자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필사적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발자국을 찾았다.


방랑자의 것 이외에는 없었다. 하지만 방랑자는 그 사실을 무시했다. 그리고, 내달렸다. 방랑자의 뒤에 남겨진 발자국의 간격은 더더욱 멀어졌고, 방랑자의 발이 땅에 닿음과 동시에 일어난 먼지구름은 더더욱 커졌다. 낡고 헤진 가죽코트자락은 바람에 휘날렸다.  방랑자의 숨이 거칠어졌다. 하지만, 방랑자는 결코 쉬지 않았다. 그 소리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잡을 듯 잡을 수 없었던 그 소리를, 결코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리하져 무너지고 쓰러진, 이전엔 거대한 도시였을 빌딩 나무들 한가운데로 나아가자, 그리고 그 쓰러진 나무들의 가장 높은 잔해로 다가갈수록, 그 소리는 점점 더 커지고 더 빨라졌다. 이제는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방랑자는 총을 더 꽉 쥐었다. 방아쇠울에 검지를 넣지는 않았지만, 언제나 조준할 수 있도록 근육을 긴장시켰다. 그리고 속도를 줄여, 숨을 가다듬었다. 서로의 무게로 겨우 무너지지 않은 체 형태를 유지하는 콘크리트 건물이 이루는 짙은 그림자 아래서, 방랑자는 어께 위의 렌턴을 켰다. 작은 렌턴은 약하고 희미한 불빛을 내뿜으며 방랑자의 앞길을 비추었다. 그렇게, 방랑자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방랑자는 원하는 것을 발견했다.

하지만 원하는 상태는 아니었다.

그는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아마 죽음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어떻게 그 목숨을 부지했는지 의문스러울 정도였다. 초점없는 눈은 무너진 잔해 사이로 비추는 어둡고 침침한 빛을 올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방랑자는, 그를 향해 다가갔다.

총을 떨어트린다. 그 쇳소리를, 방랑자는 무시했다. 그걸 무시하고서, 방랑자는 무릎을 꿇고 그의 상태를 지켜보았다. 머리를 받치고, 그에게 말을 걸었다.

"나야. 나라고."

그는 희미한 목소리로, 아주 작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죽음입니까. 날 거둬가기 위해 오신 것입니까."

방랑자는 고개를 힘차게 저었다. 그리고 방독면을 벗었다. 소녀의 얼굴이, 거칠고 관리가 되지 않은 더러운 얼굴이 드러났다. 소녀는 눈물을 한없이 흘리고 있었다.

"나야. 당신을 찾아 수많은 세계를 돌아다녔어."

그리고 그녀는 억지로 얼굴을 웃어보였다. 그는 살짝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럴…리가."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사실이야. 난 마법사가 됬어. 널 찾아나서기 위해 마법사가 됬다고."

"그럴…리가."

그는 말했다. 이번에는, 믿음이 담긴, 놀란 목소리로.

"괜찮아. 이젠 괜찮아."

그녀는 울면서,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소름끼칠만큼 차가운 몸이었다.

"너무 늦었네."

그는 말했다.

"아냐. 늦지 않았어. 널 볼 수 있었는걸. 널 찾아냈는걸. 늦지 않았어. 결코 늦지 않았어."

방랑자는 늦었다. 하지만 방랑자는 사실을 무시했다.

"…고마워."

그는 말했다. 그리고는 다시 말하지 않았다.

소녀는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공기중의 지독한 악취는 그 어느떄보다 심했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고서야, 소녀는 그의 시체를 땅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시 총을 들고, 방독면을 뒤집어 쓰고, 말했다.

자기 자신에게. 세상을 향해.

"이번에는, 기필코, 널 구해내겠어."

그리고 방랑자는 팔을 높이 들었다. 빛의 소용돌이가, 그녀의 주위로 몰아쳤다. 그녀의 머리 위로, 구멍이 열렸다. 방랑자는 그 소용돌이에 몸을 맡겼다. 어디로 그녀를 데려갈지, 그녀조차 몰랐지만, 그녀는 결코 개의치 않았다. 그 사실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기억하는 거라곤 오직, 그의 손길 뿐이었다. 그와 함께하던 과거 뿐이었다.

빛의 소용돌이와 함께 방랑자는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이 세상에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번에도. 또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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