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피 이야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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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얼핏 들은 적이 있다. 새의 날개의 꽁지를 잘라내면 그 새는 더 이상 날지 못한다고. 그걸 다시 떠올린건 그 거대한 알을 깨고 태어난 인간과는 다른, 하지만 너무나도 인간과 유사하고 그 이상으로 아름다운 소녀의 얼굴을 한 새끼 하피의 얼굴을 봤을때였다.

그 알의 출처는 어느 수상한 노인이었다. 오랜 세월을 살아남은 것으로 보였던 그는 그 세월의 여파로 눈이 멀고 이가 빠지고 손가락이 잘려있었다. 노인네는 길거리에 앉아 그 큰 알을 저잣거리의 행인들에게 보여주며 그들을 붙잡고는 말했다.

"보게! 이게 바로 하피의 알임세! 내 싸게 줄테니 이 알을 가져가쇼!"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타조의 알이겠거니, 하고 기구한 노인네를 밀치고 사라졌다. 나도 그 말을 믿지는 않았다. 나 또한 타조의 알이겠거니, 하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나는 다른 이들과 다르게 그 타조가 필요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나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기 않았기에 뭐든지 필요했었다. 빌어먹을 집구석엔 아무것도 없었고 낡아빠진 주머니 속에도 아무것도 없었으며 하루하루 일용직으로 일해 받은 품삯으로 마신 술을 빼고는 뱃 속에도 아무것도 없었다. 어렸을 적 지낸 타조 농장에서의 기억을 떠올리며 고된 일이겠지만 그것에나마 희망을 걸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으로 새출발을 하면 되는 것이었다. 물론 돈은 없었기 대문에 한밤중 거리에 누워 자고있는 노인의 품에서 알을 훔쳐왔다.

싸구려 짚풀과 헌 옷을 모아 알을 덮히며 몇주를 부푼 기대에 젖어 기다렸건만, 기다렸던 타조는 당췌 보이질 않았다. 일주일이 지나자 분노가 치밀어올라 차라리 알을 부수어 먹을까하는 생각도 들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설마 타조알이 아닌건가 하고, 말도 안되는 의구심을 갖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새출발을 꿈꾸며 마시던 술도 끊고 돈을 한푼한푼 모아 그렇게 또 일주일, 하피가 태어났다.

5~6살 즈음의 여자아이, 영락없이 그런 모습으로 보였던 그 새끼하피는 커다란 은빛 눈으로 태어나서 가장 처음 보는 사람인 나를 똘망똘망 응시하고 있었다. 맨 처음 그 소녀는 깨어진 알 밖으로 머리만 쏙 빼놓고 있었기에, 날개는 눈치 채지도 못하다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을 내밀어 날개를 파닥이자 비로소 그 소녀가 자신의 머리칼만큼 붉은 날개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이, 가위였다.

아무것도 모르고 두리번거리는 소녀를 두고, 나는 가위를 가져와 가장 먼저 날개의 꽁지를 잘라냈다.

소녀가 울기 시작했다. 아파서였는지, 배가 고파서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소녀를 어르고 달래 겨우 준비할 우유죽을 먹이긴 햇지만, 하피를 데리고 무엇을 해야할지 감이 잡히지 않앗다. 하피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취-토로 향하는 뱃사공을 홀리는 노래부르는 하피의 민담밖에 없었으니까. 알이 깨어나길 빌며 모은 돈도 그렇게 많은 편도 아닌 것을 생각하면 이 하피를 데리고 어떻게 돈을 벌어야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그냥 죽여?

아니. 나는 이것이 천재일우의 기회라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감당하기 힘든 기회라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비루하고 초라한 내 인생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돌파구이기도 했다. 일단 하늘을 날아 내 손 밖으로 빠져나갈 걱정은 덜긴 했지만 이 꼬맹이를 데리고 거리를 돌아다닐 수도 없는 모양이었기에 발목에 쇠사슬을 채우고 거적대기를 입힌 다음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노인네를 찾아 뭐라도 물어볼 생각으로 저잣거리로 나섰다.

하지만 그 빌어먹을 노친네는 당최 보이질 않았다. 몇 주간 안보였기로서니 어디로 갔나 샅샅이 뒤져봤음에도 그 노인네는 콧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할수없이 술집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알을 훔친 뒤로부턴 술집에 아예 오지 않아서 정말 오랬만에 오는 것이었다. 술을 입에 대지 않고도 몇주를 참았는데. 제길. 노인네를 찾지 못했으니 이젠 다 지나간 일이었다. 돈을 모을 이유가 보이지 않았다.

"맥주 한파인트 주쇼."

차라리 오줌이라고 하면 믿을만할 미지근한 맥주를 단숨에 들이키고 생각했다. 이 술집에는 별의별 사람이 모여드니, 적어도 그 인간의 행방을 아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이봐, 주인장. 혹시 몇주 전에 늙은 병신 노친네 한명 기억나쇼?"

"병신? 어떤 식으로? 이곳의 노친네 중 병신이 아닌 놈이 뉘있겠어?"

"그, 눈이 멀고 손가락이 잘린 노친네말요."

"그런 인간이 한둘이어야지. 공장을 그만두거나 전쟁에서 싸웠던 인간들 태반이 눈이 멀고 손가락이 잘렸는데."

"하, 거 참. 몇주 전에 하피 알을 팔겠다고 나선 노인네말요!"

알 이야기를 꺼내고서야 주인장은 누구를 이야기하는지 깨달았다는 듯 눈을 휘둥그래 뜨고 고개를 크게 끄덕거리더니 말했다.

"아, 그 양반! 타조 알을 두고 헛소리하던 그 양반말야? 그 노친네, 아마 알을 일어버린 뒤로 미친듯이 그 알을 찾아 헤메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던데?"

"사라졌다고? 그 양반이 어디로 갔단말요? 근처에 연고도 없어뵈던 양반인데."

"나야 모르지. 소문으로는 알을 찾으러 들어가서는 안되는데 들어갔다는 이야기도 있고. 이를테면 뒷골목이라던가. 그런데 그 노친네는 왜 찾는거야?"

왜긴 왜야. 하피에 대해 알고 싶어서지. 하지만 그 말을 할수는 없었기에 입을 다물고 맥주나 한잔 더 시켰다. 뒷골목이라. 이 괴상한 인생의 막을 거기서 내릴지도 모른다고 어렴풋이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 향하게 될 줄은 몰랐다. 이 망할 도시의 온갖것이 모여드는 뒷골목이었다. 분명, 그곳에서 노인네를 찾을수 있기야 하겠지. 문제는 내가 몸 성히 뒷골목을 빠져나올 수 있느냐이지만.

두잔째의 오줌을 들이키고 있을때쯤, 누군가 슬그머니 옆자리에 안장 주인장에게 말했다.

"맥주 두잔 주시죠. 한잔의 옆의 신사에게 주시구요."

옆을 보자 훤칠하게 생긴 엘프 청년이 망토를 둘러쓰고 자리에 앉아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생전 처음보는 양반이었다.

"뭐요? 공짜맥주는 환영이다만 되도않는 수작은 사양이외다. 남자는 취미 없소."

"그거 다행이군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두잔째를 비우자 주인장이 빠르게 잔을 가져가 새 맥주로 채워났다. 슬슬 취기가 도는지 얼굴이 뜨거워지고 눈이 뻐끔뻐끔 감기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다섯잔. 언제나 다섯잔 이상만 마시지 않으면 사고를 치지는 않았다.

"그럼 썩 꺼지쇼. 맥주는 잘 마시겠소."

"그런말 마시구요. 우연히도 싸구려 맥주와 성별이 다른 대상에게 관심을 보인다는 사실 말고도 저희에겐 공통관심사가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관심없수다."

세잔 째에 입을 댔다. 여전히 맛이 없었다.

"많은 돈이 걸려이싿고 해도 말입니까?"

한모금을 들이키고, 컵을 내려놓았다.

"말해보쇼."

"하하, 이야기가 빨라서 좋군요."

엘프도 맥주를 들이켰다. 이 정도로 싸구려일줄은 몰랐는듯 인상을 크게 찌뿌리고는 잔을 금새 내려놓았다.

"사실 무례한 것 알면서도 방금 주인장과의 이야기를 엿들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저희는 같은 노신사를 찾고 잇더군요."

"세상에 널린게 병신 노친네인데, 굳이 그 노친네를 찾는 이유가 뭐요?"

엘프는 빙그레 웃으며 나를 보았다. 친근하고 끈적해서 기분이 나빠지는 능청스러운 미소였다.

"정확하게는 그 노신사가 가지고 있던 물건에 관심이 많아서 말이죠."

"그 커다랗고 괴상하던 알?"

"예. 사실 제 고용주는 그 알에 매우 높은 가격을 매기고 매입하려 했습니다만, 막상 노신사와 거래하려하자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아서 곤란에 처한 상황이라 말이죠. 그의 행방을 찾는 데에 도움을 주시는분에게 큰 보상을 치룬다고 이야기하시는데, 혹시 알고 계신 정보가 있습니까?"

이거다. 이게 바로 기회다. 맥주를 들이키며 생각했다. 어떻게 이 기회를 최대한으로 확장시킬 수 있을까?

"음, 나는 아무것도 몰라."

일단 그렇게 말했다. 모름지기 협상은 밀고 당기기니까.

"하지만 알에 대해서는… 내 연을 대보면 아마 찾을수 있겠구만."

"오, 정말입니까? 인간의 수완이란 대단하군요!"

"어허, 맨 입으로?"

"아, 죄송합니다. 제가 무례했군요."

엘프는 그렇게 말하고는 품에서 종이쪼가리를 꺼내들었다.

"잠깐, 착수금을 어음으로 내려고?"

"현금을 바라시는건가요?"

"바라는게 아니라, 그게 당연한거요."

"흠. 알겠습니다. 얼마면 될까요?"

속으로 셈을 했다. 금화 50닢이면 일년 정도는 숨어서 여유롭게 하피를 어떻게 할 지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백닢 주쇼. 나도 부려야 할 사람이 있으니."

때문에 높은 값을 불렀다.

"좋습니다."

이래서 돈많은 호구놈들은 안돼. 의심 많기로 소문난 엘프라도, 호구는 호구였다.

"다만 그만한 돈이 지금 당장은 없군요. 여기, 지금 가지고 있는 열 닢이라도 일단 받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내일 여기로 다시 오신다면, 제가 숙소에 둔 돈을 가져와 나머지 아흔닢을 드리도록 하죠. 알을 주실때까지 얼마나 기다리면 될까요?"

"한 이주일만 주쇼. 금세 찾아줄테니."

"후. 한시름 놓았네요. 제의에 선뜻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얼마나 고생을 하고 있었는지… 저기요! 여기 맥주 두잔 더 주시겠어요?"

"고맙지만, 됬소. 덕분에 할 일이 생겨 바빠져서 말요. 내일 이 자리에 아흔닢을 가지고 오는걸 잊지나 마쇼."

"물론이죠."

긴장하지 않았다. 긴장하지 않았다. 그렇게 내자신에게 말하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술집을 나왔다. 바깥의 시원한 공기가 맥주로 인해 후끈해진 얼굴과 맞닿자 오한이 살짝 들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활짝 웃었다. 인생이 피고 있어. 이 망할 인생이 드디어 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고. 나는 한시빨리 발걸음을 옮겼다. 멍청한 엘프 덕분에, 할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잡화점으로 향해, 아교와 붓을 구매했다. 그것을 들고 집으로 곧장 향해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인기척에 놀란 하피가 꽥하고 소리를 질렀다. 다행히, 하피가 깨고 나온 알의 껍질은 그리 끔찍하게 부서지지 않았다. 덕분에, 일이 쉬워질 모양이었다. 조금만 손을 쓴다면, 모두가 속아 넘어가리라.



한 밤 중, 인기척을 느꼈다. 취기가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집중력을 요하는 작업을 한 덕분인지, 가벼운 편두통이 머리 끝에 남아 신경을 간질이고 있었다. 새끼 하피는 언제나처럼 끼잉거리며 자리에 웅크린체 앉아있었다. 이녀석의 기척이었을 것이라 생각하고는 혀를 차며 다시 자리에 누으려는 순간,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명확하고, 생생하게.

"샅샅히 뒤져봐."

덜그럭 덜그럭. 누군가 내 집을 뒤지고 있었다. 가장 먼저 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이 비루한 집구석을 뒤지는 멍청이가 이 도시에 실제로 있다고? 방 구석에 놔뒹굴던 나무몽둥이를 들고, 발소리를 죽인체 방을 나서 시끄럽게 내 집을 뒤지는 녀석의 뒤통수로 천천히 다가갔다.

이 거지같은 집에서 먼지를 훔쳐가게 될 미련한 멍청이는 무려 두명이나 되었다. 두건을 머리 끝까지 둘러쓴 것이, 나 도둑이요 하고 광고를 하는 것으로 밖엔 보이지 않았다. 이 정도로 멍청한 강도는 옛 이야기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더욱이, 내가 등 뒤로 바짝 다가갈때까지, 그들은 아무것도 없다고 장담할 수 있는 집을 뒤지는데에 혈안이 되어 나를 발견하지도 못했다. 두명인 의미가 없잖아. 한명은 망을 봐야지. 아마추어 새끼들.

그들에게 안타까운 소식 하나. 나에게 아마추어에 대한 자비란 없었다.

몽둥이로, 먼저 내 왼편에 있는 불운한 머저리의 대가리를 후렸다. 손 끝에서 무언가가 부서지는 즐거운 감촉과 함께, 스윙에 실렸던 힘이 그놈의 대가리에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경쾌한 소리에, 옆의 놈이 고개를 돌려 바닥으로 쓰러지는 파트너의 머리를 응시했다. 누가 봐도 놀란 그는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내게 손짓을 하려 했지만, 쉼없이 정반대편으로 날아가던 몽둥이는 멈출 생각을 하지 않은체 불운한 도둑의 안면에 정통으로 날아가 처박혔다.

창문을 열자 달빛이 안으로 새어들어왔다. 기름등을 켤까 생각했지만 창 정면에 떠있는 보름달은 방 안을 새하얗게 비추고도 남았기에 그만두었다. 애초에 등에 사용할 기름도 없었고.

하피의 발에 채워놓은 사슬을 풀어 강도를 끌고와 그의 손목에 그 사슬을 채웠다. 하피는 내 행동이 갑작스러웠는지, 또 신기했는지 자리에 가만히 서서 그 꼴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저리 꺼져. 구석에 앉아서 잠이나 자라고."

손짓 발짓을 동원해 방 밖으로 하피를 내보내고서야 겨우 멍청한 도둑의 정체를 밝힐 차례가 다가왔다. 맨 처음 뒤통수를 제대로 얻어맞았던 놈의 두건을 풀어헤치자 걸쭉한 피가 뭍어나왔다. 두건이 벗겨진 머리는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맥없이 고개를 푹 꺾은체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영락없이 죽은 시체꼴이었다. 개털 냄새. 피와 함께 섞여나온 냄새를 맡고서야 이 녀석이 견인족이란느 사실을 깨달았다. 개새끼. 목에 손을 대보아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확실하게 죽었군.

혀를 차고 다른 놈의 두건을 벗겨 보았다. 안면이 반쯤 뭉게진 녀석의 얼굴이 어딘가 친숙해보여 한참을 들여다보고서야, 그 녀석이 술집에서 만났던 엘프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녀석은 아직 살아있었는지, 꼬르륵되는 공기소리가 부서진 콧구멍 사이에서 새어나오고 있었다. 나는 바로 바가지에 물을 담아 엘프의 면상에 물을 끼얹었다. 고개를 흔들며 정신을 차린 녀석은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며 깨어났다.

"이보쇼. 우리 거래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거 아니었소?"

"펜데르 뒤 앙 투르셰- 빌어먹을 인간놈아. 지금 너는 네가 뭘 망치고 있는지 알지 못해."

끊임없이 흐르는 코피덕에, 그의 말은 반쯤 뭉게져 뭐라 하는지 알아듣기 힘들었다.

"미안한데, 난 잘 알고 있네만. 내가 망치고 있는 건 이 도시 최악의 도둑질이지. 아무리 버림받은 도시라지만 그 정도로 낮은 수준의 도둑질이 계속되도록 둘 수 없어 내 손을 쓴게지. 부정하고 싶어 아무리 귀쟁이 말을 써 봤자,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네."

그렇게 말하고는 다리, 그것도 정확히 왼쪽 무릎에 몽둥이를 박아넣었다. 나무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부서진건 몽둥이가 아니었다. 엘프가 비명을 질렀지만 이 근방에선 비명이란 한낱 가을밤의 귀뚜라미 소리와 별 반 차이가 없는 것이었다. 나는 신경쓰지 않은체 할 말을 계속했다.

"아무리 내가 무식쟁이라지만, 계약에 필수적인건 바로 신뢰라고 들었소. 대체 뭘 못 믿고 여기까지 쳐들어온거요? 빌어먹을 귀쟁이라도 신뢰라는 것의 중요성은 최소한 알고 있는 것 아니었소?"

"아교로 엉성하게 만든 알을 가지고 사기를 치려는 새끼한테서 들을 말은 아니지. 어서 하피의 알을 내놔!"

"엥? 그 알이 맞소. 그 알이 진짜라오."

피로 물든데다 달빛으로 희미하게 그 윤곽만이 보이는 엘프의 얼굴이었지만, 그 기척만으로도 충분히 그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신 것이 느껴졌다.

"개소리 집어쳐. 물이 가득 차있는 그 알이… 세상에. 알을 부화시킨거냐?"


"정답일세."

"이런 씨발…"

엘프는 내 말에 정색하며 탄식을 내뱉었다.

"좀 묻지. 대체 그 하피의 알이 뭐길래 이렇게 목숨걸고 찾는거요? 금칠이라도 해두었소?"

"넌 이해하지 못한다, 미련한 인간놈아!"

"말이 심하구만! 내가 곱상한 면상을 깨부수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야심한 밤 중에 몰래 들어온 그쪽 잘못이지 않소!"

엘프는 대꾸하지 않았다.

"여튼 앓는 소리 그만하고, 우연히도 난 아직 그쪽과 거래할 의향이 있소. 그 사실에 감사하기나 하쇼. 어떻게 하겠소? 솔직히 말해, 그 쪽이 알을 부화시킬 수고를 덜어주었으니 다행 아니오? 관심 있소?"

대꾸하는 대신, 엘프는 피가 섞인 가래침을 얼굴에 맽으며 엘프어로 무언가를 뇌까렸다.

"이 망할 양반이 아직 제 처지를 모르는 모양이구만!"

빌어먹을 엘프 새끼의 성한 다리짝에 몽둥이를 내리쳤다. 두어번 내리치자 바지에 찢어진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촉촉히 베어들기 시작했다. 엘프의 비명에 옆집으로부터 시끄럽다는 고함소리가 들려왔기에 신경 끄라는 대답을 외치고는 엘프의 앞에 쭈구려 앉았다.

"대체 내게 뭘 원하는거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엘프가 겨우 말했다.

"돈, 정보. 아. 물론 둘 다 원하는거요. 하나만 원하는게 아니라. 그러니 내 다시 묻겠소. 대체 저 하피가 뭐길래 이런 짓을 하는거요?"

"씨발, 씨발! 투르드 몽고르, 투르드 디 몽고르!"

사슬에 묶인 손목을 짓밟으며 물었다.

"어느 손잡이요? 양손잡이면 내 둘 다 한방에 날려주지."

"그만! 말해줄테니 그만하라고!"

"봐봐. 처음부터 말했으면 얼마나 좋았소?"

"씨발. 그래. 하피… 저 하피는…"

"너무 오래 끄는거 아뇨?"

발에 힘을 주었다. 근육의 힘줄이 터지는 느낌이 들었다. 소리마저 비슷했다.

"으악! 그만!"

"생각하지 마쇼. 말을 하란 말요. 되도 않는 짓은 눈에 훤히 보이오."

"알았어! 알았으니 발 좀 치우라고! 난… 내 고용주는 하피의 알을 원했소. 그 아름다운 날개와 날카로운 발톱의 심미성에 반한 것이기도 했지만, 정확하게 알을 원한 것은 하피가 가진 특성 때문이었지. 태어나서 가장 처음 본 사람을 따르는 특성말야. 자신이 부모… 아니면 주인이라고 인정한 사람의 말이라면, 하피는 뭐든지 따라. 말 그대로 뭐든지. 충실하고 강한 노예인게지."

"그렇다면 안타깝게도 이 하피가 네 고용주를 따를 일은 없다 이거요? 팔아도 아무런 가치가 없다 이거아뇨?"

"하하! 웃기구만. 그렇게 되는군! 저 빌어먹을 하피를 팔아먹을 생각만 하고 있던 네놈에겐 꼴좋은 결말이구만! 하지만 그런식으로 밖에 생각하지 못하는걸 보면 참 불쌍한 인간이구만. 한심해."

"닥치고, 다른 질문에나 답하쇼. 묵는 곳이 어디요?"

"내가 묵는 곳? 그건 알아서 뭐하게?"

대답대신, 왼손을 내리쳤다. 하지만 내리치고 나서야 그가 맥주잔을 오른산으로 집었다는 사실이 떠올라, 이내 오른손도 내리쳤다.

"숙소가?"

"여관! 여관이오! 빌어먹을 십번가와 말머릿길의 교차점에 있는, 아궁이 여관!"

"거 참 싸구려 숙소에서 머무시는구만. 고용주라는 치가 돈이 없는거요?""

한쪽 발로 어께를 찍어 누르고 다른쪽 발로 옷섶을 헤치며 품 속을 뒤졌다. 돈은 없었다. 단지 작고 화려한 옷핀 하나 뿐이었다. 그 핀을 뜯어내 주머니에 집어넣고 물었다.

"마지막으로. 금화 백닢을 실제로 가지고 있긴 한거요?"

"왜, 있다고 하면 찾으러 갈 생각이신가? …진짜구만! 숙소를 물어본게 그것때문이었어! 히…히히… 아무리 여관이 싸구려라도 생전 모르는 사람을 내 방에 들여보진 않을텐데!"

멍청한 이 엘프는 이 망할 도시를 몰라도 너무 몰랐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열배는 썩어있는 것이 이 도시였다. 아마 돈 몇푼과 말 몇마디면 키를 가지고 있는 그 만큼이나 충분히 마음대로 그 방을 들락날락 할 수 있을테지.

"알거 없소. 뭐 직접 가보면 알겠지."

방 구석에 몽둥이를 던지고, 밖으로 나가며 생각했다. 일이 이렇게 흘러갈 줄이야. 부화시키지 않는 편이 나았을까? 하지만 그것은 뒤늦은 후회였다. 애초에 부화시키지 않았더라면 나조차도 타조의 알이라 생각했을테니. 그리고 다르게 생각하면, 충실한 노예라는 것이 얼마나 귀한가! 물론 식비와 여러가지를 책임져야 하겠지만, 그 이상의 가치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구석에 있는 하피를 바라보았다. 웅크린체 오들오들 떨고 있는 것이, 말조차 하지 않는 아이였지만 지금 내가 뭘 하고 나온건지는 알고 있는 눈치였다. 혹은 그저 감이라던가. 저 녀석의 눈엔 내가 아버지로 보이는건가? 헛웃음이 나왔다. 졸지에 결혼도 하지 못하고 아이가 생겼군. 명백하게 두려움에 떨고있는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따뜻했다. 노예든, 딸이든, 아무래도 나와 함께 할 팔자였다.

"걱정마. 여기선 흔한 일이라고. 익숙해질 차례야."

손을 때자, 그제서야 손에 끈적한 무언가가 묻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녀의 머리칼에도 잔뜩 묻은 그것의 냄새를 맡으니 영락없는 피냄새였다. 손을 씻고 싶었지만, 마무리는 해야했다. 방으로 되돌아가자, 이제는 거의 고깃덩이에 지나지 않는 엘프가 꼼지락대며 탈출을 위해 발버둥치고 있었다. 철퍽이는 소리와 쇠사슬 소리가 섞여들었다.

"이제 풀어줘! 씨발, 물어본건 다 말해줬잖아?"

그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묻는 것은 내쪽이니까. 대신, 부억에서 들고온 칼을 들고 마무리 작업을 시작했다. 망할 도시의 또다른 평범한 밤처럼 말이다.



다행히도, 하피는 고기를 싫어하지 않았다. 아니, 좋아하는 눈치였다. 적어도 밥값은 생각보다 아낄 수 있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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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 [본격 휴가 나온 군인이 쓰는 불쌍한 SF 소설] 나방 (#001 - 강산은 변하지 않았다. 변한 것은 사람뿐) 레이의이웃 06.11 2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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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 [공모전에 낼 소설 초안] 꿈, 혁명, 그리고 조미료와 아스피린 (1) 댓글1 BadwisheS 05.19 25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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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 Spinel on the air(스피넬 온 디 에어) - 프롤로그 [군대간]렌코가없잖아 04.26 2260
137 마지막 약속 댓글3 안샤르베인 04.18 2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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