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아 이야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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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두마리의 타조는 재작년 아리드리안컵을 차지한 놈들로써, 초원이고 사막이고 가리지 않고 그 누구보다 매우 빠르게, 그리고 안정적으로 달리는 훌륭한 녀석들이오. 마음만 먹으면 한시간에 60킬로미터를 달리고, 배가 고프면 한시간에 80킬로미터도 달리는 놈들이지. 정말로 거금을 들이고 마련한 놈들인데, 이런 좋은 타조를 우연히도 같은 뿌리를 가진 먼 친척에게 보여줄 수 있게 되다니, 높으신 가주의 뜻은 언제나 기상천외하게 이루어 지지 않는가!"

슈나이더 엔트워프가 그렇게 말했다. 그의 말마따나, 거친 땅 위를 거침없이 내달리는 마차의 속도를 보아하니, 이를 이끄는 두마리의 타조는 배가 몹시도 고픈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러든 말든, 황야에 우거진 관목 숲 사이에 나있는 가도를 질주하는 마차를 타고 넓은 지평선이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모습을 차창 밖으로 지켜보며, 나는 한달은 족히 걸어야 겨우 빠져나갈 수 있을것만 같았던 이 사막을 우연히도 마차를 얻어타게 되어 편하게 탈출 할 수 있어 그저 기쁠 따름이었다.

"그래서, 나와 같은 뿌리를 가진 형제, 빌헬름 헤이즐워스씨는 어쩌다 이 바위사막에 홀로 버려져 있던거요?"

"그렇게 재밌는 사연은 아닙니다. 원래 몇몇의 사람들과 모여 행상을 하고 있었습니다만, 함께 데릴린으로 향하던 도중 사이가 틀어져 혼자 버림받게 된거죠. 마차에 실었던 짐을 가져가지 않은 것 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 참 잔인한 놈들이구만! 이런 사막에 사람을 홀로 내버려두다니, 양심도 없는 놈들일세. 분명 파문되어 눌이 되어버릴 쌍놈들이겠지. 하지만 걱정하지 마쇼. 내 금세 데릴린에 데려다 줄테니. 닐첸드라하는 나중에 가도 되오."

"아뇨, 그럴 필요까진 없습니다. 그리고 사실, 그냥 닐첸드라하로 향하는 생각도 하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이왕 이렇게 된거, 쥰-미르스 대륙을 떠서 케르트로 향해 위버틴에서 새출발을 해볼 생각이었거든요."

"하하! 그 배짱! 마음에 드는구만! 내 자네라면 분명 인간과 엘프의 틈바구니에서도 충분히 성공할수 있을거라 장담하오!"

"말씀만으로도 고맙습니다."

게걸스럽게 웃어재끼는 앤트워프의 태도는 개인적으로는 매우 마음에 들지않는 종류의 것이었지만, 끝없는 고행의 길에서 나를 구해준 사람에게 그 의견을 표현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뭐, 앤트워프는 먼 길을 무료하게 보냈는지 여러 종류의 이야기를 꺼내놓아 내가 많은 말을 할 일은 없었고, 그런 그의 태도를 참고 말동무가 되어주는 것 만으로도 마차에 계속 타있을 수 있다면 충분히 치를만한 가치가 있는 대가이기도 했다. 게다가, 그의 이야기는 동류의 다른 사람들과 달리 실제로 재미가 있었기 때문에 그 태도를 잊고서 좋은 경청자가 되는 것 또한 그리 어렵지도 않았었다.

"정말, 그걸 보고 눈을 땔 수가 없었단 말이외다. 직접 그 시장에 가봐야만 알겠지만 말이지. 행상일을 했다니 한번 가봤을 것 같소만?"

"예. 리마의 노상시장은 저도 한번 가봤었던 곳이죠. 하지만 일로 간데다 한번밖에 가보지 않아 말씀하신 공연은 본 적이 없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있다면 꼭 살펴봐야겠네요."

"꼭 그렇게 하시오. 사실, 이 아이도 그 시장에서 산 아이라오. 정확하게는, 지금 막 그 시장에서 이 아이를 사고 돌아오는 길이지. 내 우리 친척의 생전 처음 듣는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아이라고 장담할 수 있다오. 무려 저 타조보다 몇갑절은 되는 돈을 주고 산 아이이니 말이오! 아! 말이 나온김에 한번 직접 들어보는게 좋겠군."

한시간 동안 아리드리안컵에서 타조농장으로, 타조농장에서 리마의 거대한 노상시장의 이야기로 쉴새없이 이야기 보따리를 풀던 앤트워프는 그제서야 마차 한쪽 구석에서 조용히 창 밖을 응시하던 캐시안(묘인족) 소녀의 존재를 깨달았다는 듯 그녀를 화제로 삼기 시작했다. 오랬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어 나는 그녀가 그저 벙어리라고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노래를 하는 모습이 상상되지 않았었다.

"사실 제대로 씻기지 못해 털도 구질구질하지만, 노래는 청결과 일절 상관 없으니 걱정마시오. 계집아! 내 친척에게 노래를 불러주거라!"

하짐반 소녀는 침묵했다. 아니, 슈나이더가 노래를 부르라고 명령했다는 사실 자체는 무시하거나, 그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것처럼 그저 창 밖을 응시하고만 있었다. 슈나이더 또한 나와 같은 느낌을 받은 듯, 역정을 내며 소녀의 목과 연결된 쇠사슬을 잡아당기며 외쳤다.

"노래를 부르란 말야!"

그제서야 소녀는 고개를 돌렸다. 내가 그 소녀의 얼굴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갑자기 난폭하게 당겨진 쇠사슬에, 아니,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 처럼, 고양이를 닮은 그 얼굴에는 어떤 표정도 드러나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무표정한 얼굴을 응시하는 것 만으로도, 그 얼굴 밑에 감정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얼룩덜룩 때가 묻어 짙은 회색으로 변한 거칠고 긴 하얀 털이 이루는 퀘퀘한 분위기를 뛰어넘는 무언가가.

소녀는 그 맑고 커다란, 아무런 감정이 떠올라 있지 않는 녹색 눈동자를 좌우로 굴려 앤트워프와 나를 훑어보고는, 입을 열었다.

"어머니는 달리네, 길을 달리네,
거친 바다로부터, 높은 산을 향해,
빛나는 태양이 저무는 곳으로,
어머니는 달리네, 길을 달리네,
험한 오솔길과 거친 비탈길을 따라,
먼저 간 이는 속삭였다네,
아이야, 아이야, 뛰어서는 안돼,
하지만 어미는 길을 달렸네,
여우와 토끼의 협곡의 숲 속,
어미는 미끄러져 떨어지고 말았네,
그녀의 피는 강을 이루어,
세 갈래의 강이 땅을 적시네."

순간, 나는 거대한 극장의 발코니석에서 가장 뛰어나고 아름다운 가희의 노래를 듣는 것 마냥, 그 목소리에 홀리고 말았다. 뭐라고 표현해야할까.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과연 그녀의 노래를 평가할 만한 자격이 있기나 한걸까? 아무런 연주없이, 목소리만으로 이루어진 그 이국적이고 전통적인 수인의 노래는, 내 마음을 울렸다. 그래. 그녀의 목소리는 맑았다. 그리고 아름다웠다. 

"하하! 헤이즐워스씨, 표정을 보니 정말 감명깊게 들으신 모양이오! 내 이 아이를 사려 몇명의 경쟁자와 경쟁을 했는지 알겠소?"

"앤트워프씨, 당신이 이 소녀를 위해 얼마나 투자를 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진짜 가치있는 투자였다고 제가 장담할 수 있습니다. 이 아이의 노래는 지금까지 제가 들어본 적 없는, 정말 아름다운 목소리였어요. 저 먼 엘프들의 은빛 숲의 가희나 세계를 떠돌아다니는 크로녹스의 하얀 마녀가 부러워할 목소리였다구요. 이 노래를 살아서, 바로 눈 앞에서 들었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습니다. 이 일을 가능케 도와주신 가주님께, 평생을 빚진 것 같습니다."

그 수많은, 하지만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은 찬사는 근본적으로 앤트워프에게 보내는 아부였지만, 동시에 아름답게 노래를 불러주었던 소녀를 기쁘게 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는 것을 결코 부정할 수 없었다. 나는 그녀가 내 말을 듯고 싱긋 웃으며, 그 칭찬이 자신에게는 과분하다며 손을 절레절레 흔드는 모습을 보고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대신 소녀는 그 말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돌려, 다시 차창밖을 바라보았다. 내 말은 그 차창 밖으로 빠져나가 마차를 스치고 지나가는 매서운 바람 속에 섞여 사라지고 말았다.

마치 그 단어들의 뒷꽁무니를 쫒듯, 나는 소녀의 시선이 향하는 차창 밖을 똑같이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제서야, 나는 마차의 속도가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건 나만이 알아챈 사실이 아니었다.

"마부! 왜 갑자기 속도를 줄인겐가!"

"죄송합니다, 나으리. 하지만 이 길은 산등성이에 걸치듯 나있는 위험한 오솔길이라 자칫하면 협곡 사이로 미끄러져 떨어질 수 있습니다. 천천히 시간을 들여 지나가야합니다요."

"에잇! 변명이 심하구만! 내가 산 타조들이 이깟 시골의 오솔길도 극복하지 못할성 싶으냐? 네가 지금 몰고 있는 애들은 거칠고 급한 헤어핀도 손쉽고 빠르게 헤쳐나가고, 급한 오르막과 내리막에도 거침없이 달려나가는 놈들이야! 네놈의 몸값보다 몇배는 비싸단 말이다! 알았으면 잔말말고 속도를 내란 말야!"

손바닥 뒤집듯 별안간 짜증을 내며 앤트워프가 마부에게 호통을 쳤다. 마부는 그런 신경질적인 앤트워프의 태도에 뭐라 대꾸하려다 포기하고는 정면을 똑바로 본체 채찍을 휘둘렀다. 마부의 고함소리와 함께 채찍 특유의 바람을 가르는 새된 소리가 타조의 등짝에 휘갈겨지자, 타조들은 마치 그 불의의 일격이 서로가 서로에게 가한 것인양 서로를 보고 소리를 빼에엑 지르고는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금새 속도가 붙기 시작하더니, 이내 마차는 평원을 달릴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속도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이거 참, 안좋은 꼴을 보이고야 말았구만. 타조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그걸 모는 기수인데, 그렇게나 중요한걸 깜빡하고 말았어. 내 닐첸드라하에 도착한 즉시 저녀석을 내쫒도록 하지. 안좋은 모습을 보여 미안하네."

"아닙니다. 저에게 사과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냐, 사과를 해야지. 안그럼 내 마음이 편치 않는다고!"

앤트워프는 그렇게 말하고는, 분위기를 반전시키려는 듯 활짝 웃으며 무어라 말하려 했다. 하지만,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마차가 흔들리자 균형을 잡기 위해 문고리를 잡느라 채 말을 하지는 못했다.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다시 뒤돌아본 앤트워프는, 내가 본 것과 같은 광경을 목격했다.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나가떨어진 마부의 뒷모습말이다. 찰나에 가까운 순간, 나는 분명 앤트워프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미친듯이 폭주하는 마차는 이제 통제라고는 없는 성난 타조의 의사에 따라 위험한 비탈길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튀어나온 돌에 세게 부딛친 바퀴가 곧 부서질 듯 괴성을 지르는 것이 귀를 한가득 채웠고, 불안하게 좌우로, 그리고 위아래로 흔들리는 마차 안에는 더이상 여유라고는 찾아볼 수는 없었다.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오른쪽을 달리던 타조의 발 밑이 허물어지더니, 깊고 긴 협곡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반대편에서 달리던 타조는 그것이 자신이 알 바가 아니라는듯 커브를 향해 정면으로 달려나갔고, 허물어진 길의 구멍에 반쯤 파괴된 바퀴가 맞부딛치고 말았다. 차축째로 부서진 바퀴 또한 타조와 같은 운명에 처했고, 우리 또한 곧 그리되리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이제 마차는 오른쪽으로 돌아 사선으로 기울어져 울퉁불퉁한 바닥에 덜컹거리고 있었는데, 마차라기보다 타조 한마리에 끌려가는 나무의 잔해라고 보는 것이 타당했다. 

쿵, 한 충격에 순간 의식이 사라졌다 몇초만에 돌아왔고, 순간적으로 시간이 매우 느려졌다. 그런 내 눈에 공포에 빠져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앤트워프와, 자신의 쇠사슬을 끌어당겨 가슴팍에 모은채 깨진 창문의 틀을 꽉 부여잡은, 결코 공포에 빠지지 않을 것 같아 보이는 무표정한 얼굴의 소녀가 들어왔다.

그렇게 10미터를 채 가지 못하고 맞이한 헤어핀 구간에서 타조는 안전하게 커브 구간을 넘어갔지만, 자신이 끌고 다니던 마차의 원심력을 이기지 못하고 길을 이탈해 떨어지는 마차와 함께 거대한 협곡의 숲 속으로 내던져지고 말았다.







"…의 피를 본 적이 있니? 마셔본 적은 있니?
그의 피를 머금고 자라난 뾰족한 관목을 본 적은 있니?
칼에 베이고 창에 찔려 세상을 등질때 그의 유산을 생각하렴,
네 사랑을 다시 한번 만나고 싶다면."

어두운 무의식의 장막 속에서, 노래가 부유했다. 넘실대는 파도소리처럼, 그 목소리는 내게 가까워졌다, 다시금 멀어졌다. 붙잡아도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가는, 마침내 붙잡았다고 생각했을때, 사라져버리고 마는 목소리. 

정신을 차리자 한밤중이었다. 부서진 마차의 안은 확실히 아니었다. 충격과 함께 내던져진걸까? 두통이 의식을 지배했다. 겨우 눈을뜨자, 눈 앞에 찬란히 빛나는 보름달이 촘촘하게 하늘을 덮은 나뭇잎 사이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수많은 나뭇가지가 그 푸른 달을 가리려 애썼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멍하니 그대로 누워 하늘을 지켜보다, 그리고 동시에 두통과 싸우다 누군가의 숨소리가 옆에서 규칙적으로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일말의 불안도 초조함도 없는, 고르고 조용한 들숨과 날숨. 오른쪽, 나와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사실 바로 옆이라고 해도 해도 좋을 거리에서 나고 있었다. 그 정체를 파악하고 싶은 욕구가 스멀스멀 기어올라, 고개를 돌리려 노력했다. 하지만 눈에 비치는 광경은 변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뭐지?

그제서야, 통증이 마저 몰려왔다. 피부와 근육 사이에 수천개의 바늘을 꽂아넣고 그 바늘을 한웅큼 쥔채 억지로 쥐어짜내는듯한 고통이 척추를 타고 목 아래로 퍼져나갔다. 두통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고통이었다.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폐가 극심한 고통해 긴장하며 수축해 그 안의 공기가 빠른 속도로 목을 타고 빠져나왔다. 캑캑되는, 개와 같은 숨소리가 허공에 울려퍼졌다. 그 소리없는 괴성은 불규칙적으로 세상에 울려퍼지며 또 반복되고 또 지속되었다. 괴로웠다.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 없을만큼 괴로웠다.

"살…려…"

그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짤랑거리는 소리도 들려왔다. 인식 기능을 상실한 시야 사이로 묘인족 계집의 하얀 털이 푸른 빛을 반사하며 들어왔다. 그녀는 발버둥치는 나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도와줘. 도와달라고. 입 밖으로 결코 나오지 않는 도움을 청하며 그녀를 지켜보려 했지만, 고통에 내 몸은 경련할 뿐이었다. 그런 나를 두고, 소녀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배신감이 느껴졌다. 버림바든거야? 수인족의 노예따위에게? 또다시? 고통에 경련하는 사람을 홀로 두고, 숲 속으로 도망쳐버린거야? 온 몸을 뒤덮은 통증 사이로 분노가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나는 조용히, 소리를 지를 수 없었기 때문에 안타깝게도 조용히 저주를 퍼부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디까지 욕을 했는지 기억하지도 못한채, 나는 정신을 잃었다.







짐마차는 덜컹거리며 자갈길을 나아갔다. 내부의 공기는 싸했다. 정확하는 분위기가. 키아라나 무트 둘 다, 이 분위기의 주동자가 나라는듯, 힐끔힐끔 나를 째려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 우훌라에서 물건이 잘 팔리지 않은건 내 잘못이 크다는걸 인정하겠다. 하지만 행상을 하다보면 당연히 그럴 수 있는 것 아닌가? 모든 문제를 내게 돌리는건 이치에 맞지 않았다.

때문에 그런 분위기 속에서 두시간을 달리다,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대체 뭐가 문제야, 키아라? 우훌라는 대목도 아니었잖아? 귀찮은 일을 덜었다고 생각하라고."

"내가 단지 우훌라 때문에 짜증내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미 진작에 넘어갔을거야. 근데 문제는 그게 아니라고, 헤이즐워스."

키아라가 관자놀이를 짚으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비흡연자가 있는 이런 좁은 곳에서 담배에 불을 붙이다니, 정신이 나갔군. 생각이란걸 하기는 하는건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솔직히 말해봐. 그럼 뭐가 문제인건데? 뭣 때문에 그렇게 꿍해서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처박혀 있는건데? 내가 뭐 사람이라도 죽였나?"

"말해주라고? 솔직히?"

"해봐."

키아라의 눈을 노려봤다. 해볼테면 해봐.

"솔직히 말하면 네가 문제야."

"우훌라건은…"

"말 했잖아. 그건만 문제가 있는게 아니라고."

"헬무르, 리마, 폴루션…"

우리가 지나온 도시의 이름을, 무트가 옆에서 중얼거렸다.

"너와 합류한 이래로 장사가 제대로 된 적이 없어."

"그거야 어쩔 수 없잖아! 내가 행상인이 된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걸 잘 알고소도 받아준거면서, 이제와서 딴소리를 하려고?"

"그게 문제가 아냐! 솔직히 말해, 셈이나 이해타산을 계산하는 걸 보면 내가 봐온 상인의 태반보다 네가 나아."

"그럼 아무 문제 없는 거잖아!"

"행상을 셈으로만 하는 줄 아나."

"닥쳐, 무트. 난 지금 키아라와 이야기하고 있어."

"닥쳐, 헤이즐워스. 넌 우리와 이야기하는 거라고."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키아라가 말했다.

"그래, 내가 미개한 인간 새끼라 발언권이 없다고 생각하나보지?"

그 뒤를 무트가 따라왔다. 기회주의적인 새끼.

"문제가 뭔줄 알아? 넌 머리가 좋거든? 근데 사람을 재고 있는 그 좆같은 태도가 모든걸 망쳐놔."

"내 태도가 뭐? 솔직히 말해, 열두 가문 못지 않은 정통 예절 교육을 받은 나에게 할 소리는 아니라고 보는데?"

"그 빌어먹을 열두 가문, 열두 가문! 씨발, 네가 네놈새끼의 그 잘난 가문이 쫄딱 망한 뒤에 남은 돈으로 겨우 행상을 시작했다는걸, 이 세상에서 누가 모를 것 같아? 그런 주제에 대체 언제까지 오만한 태도로 고개를 빳빳히 세우고 다닐 생각인데? 현실을 바라보지도 못하는 새끼가 대체 뭘 하겠다고! 그 아가리에선 욕이야 나오지 않겠지만 행동거지 하나하나에서 그 오만함이 전부 보여! 그 좆같음 때문에 사람들이 우리에게서 물건을 안사는거고!"

"누가 그렇게 생각한-"

"내가 그렇게 느끼고, 무트도 그렇게 느끼고, 헤인스도 그렇게 느끼고, 이 빌어먹을 세상 전부가 그렇게 느껴. 네가 말한 그 잘난 열두 가문도 죄다 몰락해가는 판국에, 되도않는 방계의 마지막 일원인 주제에 그 태도는 어디서 나오는 거야?"

"닥쳐라, 키아라! 네가 아무리 가문에서 파문당한 눌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선조를 욕해서는 안되지!"

"씨발, 이제 선조를 신경쓰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허울만 남은 전통의 잔재를 따르는 너나, 일부러 성을 버리고 세상으로 나온 나나, 다를 것 하나 없는건 알고 있냐?"

"개소리마! 내 가문을, 가주를 모욕하지 마라!"

"가주는 개뿔! 어디 한번 그 잘나신 가주한테 빌어, 마법을 써보지 그래? 내게 천벌을 내리란 말이다!"

주먹을 날렸다. 온 힘을 실어 오른 주먹을 키아라의 얼굴을 향해 날렸다. 하지만 그녀는 찰나의 시간에 그 주먹을 피했다. 주먹이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느끼는 사이, 키아라는 주먹 안쪽으로 몸을 숙이며 파고들었다. 키아라의 오른 주먹이 명치에 박혔다. 숨을 제대로 쉬고, 자세를 바로잡기도 전에, 키아라는 상체를 비틀며 왼 주먹을 내 턱에 박아넣었다. 시야의 사각에서 날아온 어퍼컷이었다. 번쩍하고 세상이 빛나더니 균형을 잃고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참아, 키아라!"

모트가 키아라의 옆구리를 붙들고 말했다. 아직도 화가 안풀렸는지, 키아라는 굳센 모트의 품 안에서 끊임없이 버둥거리며 욕짓거리를 내뱉었다. 더러운 새끼들. 서로 그렇게 붙어먹기나 하라고. 이딴 더러운 짓도 이제 그만하련다. 소꿉장난과도 같은 행상에 진력이 나, 외쳤다.

"헤인스, 말을 멈춰! 이 빌어먹을 새끼들과는 더는 못있겠어!"

"누가 할소리! 꺼져, 헤이즐워스. 네놈 새끼와는 더 이상은 일하지 못하겠어! 너보다 일 잘하고 성격이 좋은 상인이 세상에는 널렸어! 그 잘난 가문의 허상 속에서 영원히 살아가며 자위나 하라지! 어서 가라고! 꽁무니를 빼고 도망이나 쳐! 영원히 현실로부터 도망쳐!"









정신을 다시 차렸을땐, 통증은 사라져있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왜일까?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지표에서 가라앉은 통증이었지만, 분명 수면과, 시간과, 분노가 조화를 이루여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짐작했다. 침을 삼키자 텁텁한 흙 맛이 느껴지긴 했지만, 문제될 건 없었다. 몸에 힘을 주자 아까와 같은 근육통이 느껴지는 대신 조금씩,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낡고 오래 쓰지 않은 경첩처럼 삐걱거리기는 했지만, 움직인다는 것 만으로도 희소식이었다. 먼저 자리에 누워 고개를 좌우로 돌려보았다. 날은 밝았다. 낮. 정확한 시각까지는 모르곘지만 최소한 새벽과 황혼보다는 정오에 가까운 낮이었다. 얼마나 정신을 잃고 있었는지, 협곡에 떨어진지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팔로 등 밑의 땅을 짚어보았다. 땅이 아니라, 평평한 바위였다. 주위로부터 살짝 튀어나온, 사람 크기의 바위인 듯 했다. 팔과 허리에 힘을 주며 천천히 일어나 보았다. 등근육이 조금씩 이완하며 새된 소리를 내는 것만 같았지만, 의식적으로 무시하는데에 겨우 성공했다. 생각했던 것처럼, 나는 숲 속에 있엇다. 매마른 저 위 고원지대에 기적적으로 내린 비가 모여 수백, 수천, 수만년동안 천천히 깎아내려 만들어낸 협곡 속에는 우거진 활엽수가 자리잡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마 그 나무들에 수없이 부딪친 덕분에, 내가 살아남은 모양이었고. 고개를 돌리며 주위를 살펴보니 얼마 지나지않아 처참하게 부서진 마차의 잔해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렇게 산산조각으로 부서질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사람을 지킨다는 원초적인 역할을 충실히 마친 체 수명을 마쳤다는 의미였으니까. 하지만 그 옆에 놓인 것을 보고는 식겁할 수 밖에 없었다. 화려했던 하얀 흰색 셔츠가 이제는 갈색으로 변한 피로 염색되어 알아보기 힘들었음에도, 그 시체가 앤트워프라는 것을 놓치기는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뚱뚱한 배를 위로 한 체 미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누워있는 앤트워프의 배떼기엔 거대한 나무조각이 박혀있는 것으로 보아, 그의 죽음은 확실해 보였다. 조금 멀어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평온하길 속으로 빌었다.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드높은 절벽이 반대편과 똑같이 웅장하게 계곡을 감싸안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지 않는 것이 있었다. 묘인족 계집이었다. 침을 꿀꺽 삼켰다. 그래, 어쩌면 이게 더 잘된 일이야. 통증이 가셨으니, 어떻게든 혼자 걸어서 살아 남을 수 있겠지. 숲 속에서 혼자 야영을 하는 것은 처음이지만, 뭐가 그리 어렵겠는가. 혼자 살아남는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무모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언제는 또 무모하지 않았는가. 나는 자문했다. 가진 것을 모두 팔고 행상일을 시작한 것 자체가 무모했었는데.

하지만 그 생각이 단순히 무모할 뿐만 아니라 멍청하기까지 했다는 사실을 직후에 깨달았다. 왜 그 명백한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까? 아마 무의식의 영역에서 내 의식을 보호하기 위해 일부러 망각한 것일까? 아니면 마비된 감각 덕에, 의식이 무뎌져 무심코 지나치고 말았던 것일까? 하지만 이유가 무엇이든 살아남는다는, 생존이라는 행위는 철저히 깔끔하고 날카로운 이성에 입각해 이루어지는 탓에, 인식하지 못한 현실이 환상을 깨부수고 내게 다가왔다. 나는 걸을 수 없었다. 왼쪽 다리가 종아리 아래로 처참하게 뭉게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언가에 의해 찢겨져나간 바지 아래로 적나라하게 드러난 상처는 왜 그로인한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지 의문이 갈 정도로 심각했다. 다른 몸이 성했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았다. 짐작컨데 왼쪽 다리의 상태는 거대한 마차의 잔해와 부딛치고 뭉게지고 비벼져 말 그대로 부서진 것과 다름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미 상처 주위는 퍼렇게 부어올랐고, 상처에선 누런 고름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근육을 지지해야 할 다리 뼈가 수백개의 조각으로 나뉘어 그 근육 사이사이로 파고들어, 몇몇은 상처 밖으로 튀어나온 상황이었기에, 왼 다리는 오른 다리와 비교하면 차라리 고깃덩이라고 하는 편이 더 나아 보였다.

이 바지를 누가 찢었는가에 대해선, 사실 명백한 답이 이미 나와있었다. 아마 캐시언 계집이겠지. 하지만 왜? 지금 이 다리가 나를 잡아먹을 통증을 내뿜지 않는거지? 의술에 대해 많은 것을 알지 못하는 나로써도, 이 정도의 상처가 오랜시간 방치되어 있다면 이미 이 다리는 썩어가기 시작해야 했고, 나는 고열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어야 했다. 고름이 조금씩 흘러나오긴 했지만, 이 부상은 그런 상황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 이야기는 단 한가지를 의미했다. 그 소녀가 날 살렸다. 다리의 부상이 악화되는 것을 지연시키고, 그 방법은 알지 못했지만 상처 왜?

소녀는 왜 날 여기에 끌어다놓은거지? 왜 날 치료한거지? 수많은 물음에 나는 마땅한 대답을 하나도 내놓을 수 없었다. 혼란. 

그리고 쇠사슬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숲 속에서 소녀가, 언제나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내게 걸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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