雪遠 - 1

Novelistar 0 3,249
"선생은 어떻게 생각하슈?"
"예?"
옆 자리에 앉아있던 문화부 박윤수 기자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나는 그저 당황 그 이상의 것이 얹어진 마냥 제자리에 굳어버렸다.
"오늘 뭔가 발표하실게 있다던 갑자기 서남書襤 박사님이 잠적하셨잖우. 이유가 뭔 것 같은지……."
"정말입니까? 최근 연락해본지는 좀 되었습니다. 게다가 서남 선생님 계시는 인제에 눈이 많이 오고 있다고 하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지금 저-어기 떠들고 계시는 학회장님이 빨리 입 닫기만을 바라고 있겠구먼."
그가 아무 것도 비춰지지 않고 있는 프로젝터 스크린 앞에 서서 마무리 멘트를 하고 있는 침심沈心 문학연구회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는 그 앞에 두 줄로 늘어서 있는 책상 그 맨 끝에 앉아 있었다. 나는 계속 그의 입술과, 등 뒤에 있는 출구를 번갈아 의식하며 초침의 움직임 한 번 한 번을 신경쓰고 있었다. 목이 말라왔다.

"……그러면 이제, 서남 선생님이 불참하신지 두 시간이 지났으므로 일단 여기서 마칩니다."
협회장의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나는 자리를 박차고 문을 열고 달려 나갔다. 계단을 두 계단 세 계단 씩 성큼성큼 뛰어 내려가다시피 하며 지하 주차장으로 달려가 자가용의 문을 열고 시동을 걸었다.

인제군에 다다르기도 전에, 눈송이는 저번에 서남 선생님을 찾아 뵈었을 때보다 더 굵고 빼곡하게 하늘을 메우며 지상으로 강하降下하고 있었다. 초조하게 핸들을 잡은 손의 손가락을 툭 툭 굴리며 신호를 기다리던 즈음, 휴대전화가 울렸다. 운전 중이라는 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몇 일간 물 한 방울 마시지 못한 사람이 물을 본 듯 날렵하고 간곡하게 전화를 조수석 시트 위에서 낚아채 받았다. 인제 백병원이라는 다섯 글자가 귀에 스쳐 지나갔고, 나는 빨간불과 눈이 쌓인 도로임에도 불구하고 핸들을 직각으로 틀었다.

"지하 1층으로 가시면 되요."
간호사의 말을 듣자 마자 곧장 안내데스크에서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21F. 간호사에게 선생님의 성함을 말하자마자 나온 번호. 방금 전에 실려오신 모양인지 간호사가 곧장 알려주었고, 나는 그 번호의 병상을 찾아 응급실 내부를 샅샅이 둘러보았다. 21A……E……F.

F에 시선이 멈춘 순간, 어디선가 멀고도 가까운, 누군가가 떠나는 걸 남겨진 이들이 모두 슬퍼하는 울음 소리가 들렸고, 시선을 침상 번호에서 서서히 침상쪽으로 내리자, 익숙하지만 아주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살아있던 한 노인과 그의 오른쪽에 그의 손을 붙잡고 애써 소리 죽여 울다 끝내 터져나오는 울음에 몸을 맡긴 한 아가씨가 보였다. 沈心. 마음에 잠겨라. 네가 느끼는 모든 것들에 잠겨 들어가라. 그것이 곧 너이고 그것이 곧 네 글이다.

내게 그렇게 가르치셨던, 글밖에 모르던 어떤 위대한 청년 소설가는 늙은 얼굴로 병상에 누워 심박 측정기의 이묘異妙한 곡소리와 함께 세상을 떠나셨다. 의사 말로는 심각한 동상과 저체온증이란다. 나는 텔레비전이나 소설에서 어째서 살리지 못했느냐고 의사의 멱살을 잡는 유가족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선생님의 지인 분들의 의견에 따라, 자식이 없는 선생님의 장례식의 상주가 되어 삼 일간 식을 치르고, 육신에 얽매이지 않고 죽고 나면 하늘을 날아보고 싶다. 궁금하다. 라고 하신 말씀처럼 굴레를 벗겨드리고 나서 마지막까지 선생님 곁에 있던 아가씨와 단 둘이서 선생님이 평소 좋아 하셨던, 탁 트인 전경이 내다 보이는 전망 좋은 산등성이의 절벽 부근에 선생님의 유골을 묻었다.

그녀는 그때까지도 아무 말도, 아무런 감정도 없어 보이는 표정으로 있었다. 내가 눈이 쌓여 곧 얼어붙을 땅을 삽으로 파려 할 때, 그녀는 아주 조용하고 나지막한 움직임으로 눈밭 위에 꿇어 앉고는 잠시 나를 올려다 보더니 세수를 할 때처럼 두 손을 정성스레 모아 눈을 뜨고, 옆에 붓고. 뜨고, 붓고를 반복했다. 나는 잠깐 입을 열었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옆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눈을 퍼낸 손이 창백해졌을 뿐, 떨지도 않고 삼십 분 동안 눈과 땅을 파내어 선생님을 묻었다. 그리고 걸어 내려왔다. 나는 왠지 '일을 마친 일꾼처럼' 삽을 들거나 메고 내려가는 것이 탐탁치 않아서 그냥 어디 한 구석에 버리고, 먼저 내려가기 시작한 그녀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녀는 내 차의 조수석에 오를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선생이 묻힌 곳을 의식하면서 운전을 하다가, 어느새 멀어져 갈 즈음,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서남 선생님과 어떤 관계…인지 물어도 될까요."
그녀는 조용히 손을 살며시 깍지 낀 채 배 위에 놓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녀는 몇 분간 말이 없었다. 조용했다. 가을에 이미 모든 곡식을 수확한 논에 수북이 쌓인 눈. 광활한 들판과 눈을 덮어 쓴 눈꽃가지들과 나무들. 선생님의 죽음. 몇십 년은 어긋나있는 다른 세상에 와 있는 듯한 이질감이 들었다.

그 이질감 속에서, 황량한 감정과 텅 비어 있는 눈의 사막을 보며 달리며 나 자신의 존재감마저 내 머릿 속에서 잊혀갈 즈음, 그녀가 나지막히, 소리가 발發하고 나서 얼마 후 알아들을 수 있을 그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자…에요."


1


나는 왠지 모르게 그녀가 그러고 싶어하는 것 같아 선생이 살던 산 속의 집으로 차를 돌렸다. 산 깊숙한 곳으로 차를 끌고 올라가면 울타리도 없고 근처에 아무런 나무도 없는, 마치 산 정상과 같이 느껴지는. 산이라기보다는 오름의 꼭대기에 집을 지은 듯한 곳으로. 나는 멀찍히 차를 대놓고 시동을 끈 다음 잠시 아무 말도 없이 선생의 집 주변의 눈밭을 차창 너머로 바라보았다. 저 곳이, 왜인지는 모르지만, 선생님이 그 폭설 속에서 깊은 발걸음으로 헤쳐나가다 쓰러진 곳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그녀는 출발했을 때와 같은 자세로 가만히 있었다. 조용히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 오르락 내리락하는 작은 가슴팍만이 움직일 뿐이었다. 그러다, 그녀는 안전벨트를 풀고, 조용히, 나비와 같이 신중하다기보단 조용한 움직임으로 차 문을 열고 눈을 밟았다. 뽀드득하며 그녀의 신발 밑창 아래에서 눈송이들이 우그러들다가 부수어졌다. 나도 그녀를 따라 차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잠시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고,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저만치에 있는 선생님의 통나무집을 내다 보았다. 꽤나 멋지게 지어진 집이었다. 눈이 수북히 쌓인 지붕이 보였다. 그녀는 걸음을 옮겼고, 나는 잠깐 뛰어나가 그녀의 앞에서 그녀가 쉽게 걸을 수 있도록 발자국을 남기며 눈을 헤쳐나갔다. 그녀는 아무도 없다는 듯, 내 뒤를 따르기보다는 그저 그녀의 페이스대로 집으로 걸어갔다.

서남 선생님은 절대로 집 문을 잠그지 않았었다. 잠금장치를 안에서 열고, 밖에서 열쇠를 잠그고. 그런 사소한 행동 하나 하나가 생략될 때, 어떤 기분이 드는지를 느끼고 싶으셨던 분이었다. 내게 글을 가르치고, 지금의 내가 있게 해준 분. 그런 분의 제자. 나는 문 앞에 서서 그녀가 오기를 잠시 기다렸다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며칠간 비어 있던 탓인지 집 안은 바깥과 다름없이 쌀쌀했다. 나는 평소대로 문을 열고 들어가면 바로 왼쪽에, 바깥을 내다볼 수 있게 나있는 거실의 커다란 창문 옆 소파에 앉았다. 그녀가 따라 들어와 현관문 바로 옆의 벽난로에 파이어스타터로 불을 지피고 구석에 쌓여 있던 통나무 두 조각을 가져와 불을 먹인 다음 세 조각을 더 넣었다. 그리고나서 벽난로가 있는 벽을 따라 걸어가다 오른쪽의 주방으로 들어가 물을 끓였다.

선생이 마시던 둥굴레차는 뒷맛이 달달하지가 않아서 좋았다.                                                                                                20141003 0245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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