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파 시리즈] 변신 이야기 ②

로크네스 0 2,722
 
1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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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갔던 캠핑에서 부모님은 나한테 잡다한 심부름은 맡겼지만, 고기 굽는 건 두 분께서 직접 하셨어. 내가 하기엔 너무 위험하다고. 하지만 그 이후로 시간이 꽤 지났고, 그래서 비엔나 봉봉하고 쿨도어한테 나도 끼워 달라고 멋대로 졸라 봤더니 의외로 또 흔쾌히 수락해 줬어. 잘려나간 고기 조각들이 집게에 집혀 달궈진 불판 위로, 하나씩 하나씩, 캠핑 땐 이걸 그저 보기만 했는데, 지금은 내가 직접 하고 있어. 그리고 침실 문가에 주저앉은, 상황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나의 사랑스러운 텔레오그릴루스 엠마의 커다란 눈은 그 과정을 전부 보고 있어.
“푸파, 그쪽에 있는 거 뒤집어야겠다.”
“알았어.”
방이 너무 어둡네. 안 보이지? 불 좀 켜야겠다.
“알았어.”
그 애는 정말로 그렇게 말했어. 침실에 불이 환하게 들어오고, 잠시 눈이 부셨다가 적응이 될 즈음, 입에 테이프가 붙여진 중년 남녀는 침대에 묶인 채 그 딸의 눈앞에서 필사적으로 꿈틀대고 있었어. 그래, 그 딸은 아직도 이 상황을 이해 못 하는지, 아니면 그저 갑작스러운 사태에 정신이 무너져버린 건지, 칼을 든 채 침입한 위험천만한 여자애의 말에 너무나도 충실히 따르고 있었지.
“고기 부족하다. 그거 좀 더 잘라줄래?”
잘라주고말고. 봐, 지금도 하고 있잖아. 먼저 아버지 쪽부터 자르면 되지? 사각, 사각, 이 칼은 집에서 가져온 거야. 캠핑 때 보고 마음에 들어서, 이걸로 하면 되겠다 싶어서. 여기 이 톱날 덕분에 고기도 야채도 뼈도 살도 깔끔하게 잘라진답니다. 놓칠 수 없는 기회, 지금 바로 전화하세요! 홈쇼핑 광고 속에서 시연을 보이는 사람처럼 나는 생글생글 웃고 있었어. 손끝부터 천천히, 전부 토막을 내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가장 고통스러울지 생각하면서. 즐거웠냐고? 글쎄, 굉장히 긴장하고 있었던 것만은 확실히 기억나. 그도 그럴 게 관객이 있잖아. 그냥 관객이 아니지. 그 애는 심사위원이야. 버튼을 누르면 전광판에 선고가 번쩍, ‘이해했어!’ 아니면 ‘이해 못 하겠어!’ 둘 중 하나가 뜨지. 이건 이를테면 오디션 프로그램 같은 거야. 심사위원을 이해시키지 못하면, 그러면ㅡ안 돼, 지금은 그저 여기에 집중하자. 내 모든 것을 전부 보여주지 않으면 의미가 없잖아. 자아, 나를 봐. 눈을 감지 말고 고개를 돌리지 말고, 내가 너희 부모님한테 무슨 짓까지 할 수 있는지 똑똑히 보라고.
“푸파! 고기가 타잖아!”
알았어, 알았다고. 굽는 건 이번이 처음이란 말이야. 태우는 것밖에 안 해봤다고. 게다가 원래 이렇게 빨리 구워지는 건가? 쿨도어가 가져온 아웃도어용 연료 젤이 아무래도 화력이 너무 강한 것 같아. 한국에서 쓰던 건 안 이랬는데. 그래봐야 두 번밖에 안 썼지만. 캠핑 때는 고기를 구웠고, 그리고 그 때도, 화려하게 해체된 두 사람의 고기가 불판 대신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었고 나는 피범벅이 된 바닥을 젤로 꼼꼼히 칠해갔어. 굉장히 기쁘고 들떠 있어서 굉장한 속도로 했던 게 기억나. 왜냐면, 그래, 심사위원이 하는 걸 보아하니 아무래도 결과가 좋을 것 같았거든. 모든 것을 그 커다랗고 까만 눈에 전부 담은 뒤에도, 그 애는 도망치지도 비명을 지르지도 기절하지도 않았어. 대신에 나랑 같이 연료 젤을 구석구석 칠하면서, 아아, 얼마나 멋진 시간인지!
 
아까부터 나를 졸졸 쫓아다니는 프랑스 여자애한테 비엔나 봉봉이 고기를 몇 점 나눠줬더니, 이번엔 걔네 어머니가 과일에 맥주까지 가져오더라고. 아버지는 저 멀리서 혼자 담배 피우고 있는 것 같은데, 뭐 가족이란 게 항상 함께할 수는 없는 거니까. 프랑스 여자가 재잘대는 것처럼 경제위기 때문에 남편이 직장을 잃어서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받을 수도 있는 거고, 부모가 저기 저 비엔나 봉봉처럼 술을 퍼 마시다가 맛이 가서 애들을 때릴 수도 있는 거고, 다 괜찮았는데 하필 제정신이 아닌 애가 태어나서 다 망쳐놓을 수도 있는 거지. 그래서 이런 일이 생기는 거야. 집이고 부모고 활활 불타는데, 그 집 딸은 이 모든 범행을 저지른 범죄자랑 같이 샤워나 하면서 “샴푸 많이 써도 돼?” 이러는 거야. 난 단언할 수 있어. “응, 얼마든지 써. 이젠 아무도 뭐라고 안 하잖아.” 이렇게 대답하면서 뒤에서 꼭 껴안아 주던 이 순간이야말로 내 인생의 절정이었어. 지금 이 순간, 마법처럼, 지옥의 불꽃처럼 가장 환하게 타오르는 절정.
하지만 ‘절정’이라는 단어는 그 자체만으로도 비극적이야. 절정에 오르는 길은 힘겨운 오르막길이지만, 절정 이후로는 비참한 내리막길만이 남으니까. 짧디 짧은 환희를 위해 나는 그 모든 지루함을 견뎌왔지만 보상은 곧 끝나고 말아. 불타는 집 앞에서, 소방차가 비탈을 오르지 못해 쩔쩔매는 사이에. 계획은 전부 세워져 있었고 몰래 도망쳐서 공항으로 가면, 비행기를 타면, 먼 땅에 발을 디디기만 하면 되는 찰나에 그 애는 고개를 저었어. 불꽃이, 마음속에 환하게 타오르던 지옥불이 사그라지고 있었어.
“많이 먹었어?”
응, 쿨도어. 솔직히 말하자면 좀 과식한 것 같아. 뇌가 환각 속에서 헤매는 동안 몸은 멋대로 영양분을 보충하고 있었던 모양이야. 불판의 열기는 식어가고, 태양의 열기도 그에 비례해서 식어가고 있어. 두 번째, 고기를 먹으려고 한 게 아닌 것까지 합하면 세 번째 바비큐 파티였으니 별로 즐겁지도 않았어. 모든 열기는 언젠가는 식게 되어 있는 거야. 그 애를 앞에 둔 내 몸의 열기도 그렇게 밤바람에 빼앗겨 차가워지고 있었어. 사형선고는 피했지만, 막 징역 선고가 내려진 참이었어.
“왜 같이 안 간다는 거야?”
핏기 잃은 손은 허공에 그대로 멈춰 있었고 그 애는 끝까지 손을 잡아주지 않았어. 대신에 내 모든 것을 빨아들일 것처럼 새까만, 블랙홀 같은 눈동자로 나를 응시했어. 블랙홀이 떨리고 있는 게 보일 정도였어. 내가 한 짓 때문에, 눈앞에서 부모가-물론 제대로 된 부모는 아니었지만-바비큐가 되는 걸 전부 지켜보게 했기 때문에 그 애는 망가져가고 있었어. 그렇게나 어린 애였으니까 당연하지. 하지만 그런데도 얇고 창백한 입술 사이에서 나오는 그 가냘픈 단어들은 심리 검사 결과만큼이나 논리적이고, 냉정하고, 나 자신보다도 나를 더 잘 이해하고 있어.
“너, 넌 내가 있으면 충분하다고, 나만 있으면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잖아. 그래서 안 돼. 내가 곁에 있으면 넌, 넌 절대로 변하려고 하지 않을 거야. 그러지 마. 나아질 수 있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어. 나는 비록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는 미치광이지만 그래도 그 애랑 같이 있으면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그 애는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이었으니까 둘이서 있으면 언제까지고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그 애가 생각하기엔 그게 아니었던 거야. 나는 아팠고, 치료를 받아야 했고, 심지어 벨기에라는 나라를 선택한 것도 그것 때문이었어. 와플이나 플랜더스의 개 때문이 아니라, 루벤 대학의 스텔라 오티에르 교수가 나와 유사한 증상을 보이는 환자들을 연구한 적이 있기 때문이었어. 내가 가르쳐 준 그대로 인터넷으로 모든 정보를 긁어모았고, 내가 그 애한테 진짜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신나게 계획을 짜는 동안 그 애는 내가 치료를 받게 하려는 계획을 짜고 있었던 거야. 정말, 정말이지 그걸 깨달았을 때 나는, 그저……, 난 네가 어쩌면 나를 이해해주지 못할 거라고, 내 진짜 모습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런데 넌 이렇게나 나를 이해해주고 있었어. 그 애는 나한테 문제가 있다는 걸 이해하고, 인정하고, 나아질 수 있다고 말하고 있었어. 엄마도 아빠도 마지막까지 하지 못했던 걸!
하지만 동시에 그 이해는 잔인한 선고이기도 했어. 치료를 받으라고, 나아지기 전에는 돌아오지 말라고, 만나주지 않을 거라고. 그건 즉, 이제 겨우 끔찍한 삶에서 벗어나려고 하는데 행복이 멀리 달아나버리려 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지. 그 애는 계속 말했어. 아무도 죽이지 말라고,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고, 정당방위에 대해서, 벨기에에서 해야 할 일들에 대해서. 나는 그 자리에 서서 진정으로 이해받는 기분에 한껏 취하고, 또 그 애가 날 너무나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기에 함께 있을 수 없다는 사실에 한껏 절망하고 있었어. 그 애가 나를 떠밀 때까지. 소방관들이 오기 전에, 경찰이 오기 전에 떠나야 한다고. 그 애와 나눴던 마지막 대화는 그 때였어. 내가 무심코 물었을 때.
“어느 쪽으로 가야 될까?”
그 애는 지쳐서, 간신히 그 연약한 몸을 가누면서 손을 들어 내가 왔던 길하고는 반대쪽을 가리키며 입술을 달싹여 나한테 말하길,
“저쪽 길에……, CCTV 없어.”
모든 문제에 마법처럼 답을 내놓는 그 아이에게서 들은 마지막 대답, 그게 마지막이었어. 그 말 이후로 2년이 지났어. CCTV에 살짝 찍힌 게 전부인 불분명한 내 형체가 한국에서는 ‘소녀 A’라는 의미심장한 이름의 유령이 되어 미해결사건과 청소년범죄의 상징으로서 떠돌고 있지만 나는 여기에 있어. 아르덴 숲 한복판에, 모든 일과가 끝나고 텐트 안에 누워서, 비엔나 봉봉이 이렇게 말하는 걸 들으면서.
“진짜 재밌었어! 푸파 말대로 캠핑 오길 잘한 거 같아.”
그 애 말대로 여기에 오길 잘한 걸까? 2년 동안 나아진 게 하나도 없는데? 그래서 돌아갈 수 없다면, 나를 진정으로 이해해 주었던 유일한 사람을 다시 볼 수 없다면 나는 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걸까?
 
나는 왜 여기에 있는 걸까. 그런 어마어마한 문제를 생각하기엔 지금 머리가 너무 아픈데다가 인식의 문 저편에서 환각들이 어서 건너오라고 손짓을 하고 있으니, 가능한 한 스케일을 작게 해서 생각해 보자. 나는 왜 지금 텐트 안에 처박혀 있을까? 그건 간단해. 아파서 발버둥치고 물에 빠지고 환각 속에서 헤매는 동안 해가 져서 잘 시간이 되었기 때문이지. 밤새도록 떠들 생각인 것 같았던 비엔나 봉봉이랑 쿨도어는 피곤에 지치고 맥주에 취해서 순식간에 꿈나라로 떠나버렸고, 나는 이 지루한 현실에 홀로 남겨졌어. 그래, 이건 이해할 수 있다.
그럼 나는 왜 지금 이 캠프장에 있을까? 그것도 어려운 건 아니야. 몸이 아플 땐 좋은 공기 쐬면서 요양하는 게 제일이라고 쿨도어가 우겼으니까. 왜 하필 아르덴 숲에? 이것도 쉽지. 내가 정한 장소인걸. 아무한테도 말은 안 했지만 아르덴 숲에 살인마가 돌아다닌다는 소문이 돌고 있으니까. 시체가 발견되고, 나무에 웃는 얼굴이랑 물고기 표시가-그게 살인마랑 무슨 관련인지는 모르겠지만-그려져 있어서 ‘웃는 얼굴 학살자’라는 멋들어진 별명까지 붙었고, 덕분에 인터넷에서는 온갖 억측이 들끓고 캠프장은 특가 할인을 하고. 그런 상황이니 이왕 캠핑을 할 거라면 그나마 덜 지루한 데에서ㅡ
덜 지루한?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살인마가 그렇게 재밌나?
아니, 그렇지 않잖아. 이 정도의 소문은 어디에나 있다고. 범죄자 무작정 쫓아다니는 건 한참 전에 질렸고, 그게 존재 여부조차 모르는 범죄자라면 말할 필요도 없어. 희미한 희망만을 가지고 쫓아다니는 건 정말 생각만 해도 지루하고, 4개국 국경에 걸친 이 드넓은 아르덴에서 내가 진짜 살인마를 만날 가능성을 생각해보면 차라리 아프다고 우기면서 안 오는 게 나았을 거야. 충분히 할 수 있었다고.
그런데 왜 여기에 왔지?
이건 생각보다 까다로운 문제네. 이럴 줄은 몰랐는데. 아파서 침대에서 끙끙대면서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기에 지금 여기에 있는 거지, 그래, 정신이 나가 있었기 때문에 멍청한 판단을 했다고 말하면 모든 게 간단하지. 언제든지 심신미약을 주장하는 것만큼 편리한 꼼수도 없다고. 하지만 이 경우에는 안 먹혀. 왜냐면 나 스스로 그게 아니란 걸 아주 잘 알고 있거든. 그게 답이 아니란 것 정도는 알겠어. 하지만,
 
나는 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걸까?
 
아아, 확실히 정신이 이상해지긴 이상해진 거야. 이렇게나 온 몸이 아픈데, 팔다리가 저리고 아랫배에서 전신으로 통증이 소용돌이치며 퍼져 나가고 있는데, 이런 상태로 여기까지 따라와서, 멍청한 질문에 사로잡혀서, 이젠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뭘 하고 있는지조차 모르겠어.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건 나를 꼭 껴안고 있던 쿨도어의 팔이고,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 하는 말에 으응 하고 답하면서도 나를 놓아주지 않던 그 감촉이고, 억지로 몸을 비틀어 빠져나와서 터덜터덜 걸어나온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여긴 어디야? 어둡고, 달빛이 있어서 뭔가 보이긴 하는데, 나무를 지나고 숲을 지나면 여긴 호수일까. 아까 낚시하다 빠진 호수랑은 다르고 아마 숲 속 깊이까지 들어온 것 같은데.
호수는 부글부글 끓고 있었어. 김을 내뿜으면서. 환각일까? 호수가 끓는 환각은, 지금 당장 내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기 때문에 보이는 걸까? 실제로 속이 뒤틀리고 있긴 해. 아파, 구역질이 나, 그리고 더 끔찍한 건 저 끓는 호수가 환각이 아니라는 거야. 더 가까이 가서 보면 알 수 있어. 달빛 아래 날아오르는 증기는 사실은, 수면에서 끓어 넘치듯이 우화하는 하루살이들의 안개였어. 미친 듯이 날아올라 서로 부딪히고 요동치는 수만 마리 하루살이 떼의 춤추는 구름이었어ㅡ
그 구름에 둘러싸여서, 나는 호숫가에 그대로 쓰러지듯 엎드렸어. 머리가 너무 아파, 무거워, 손을 내려다보면 아직도 피가 줄줄 흐르고 있어. 그 광경을 보고 다시 구역질이 나고 속에서 참을 수 없는 소용돌이가 폭발하는 것처럼ㅡ그대로 전부 토해냈어. 하루살이 떼에 둘러싸여서. 아까 먹은 거 전부, 입 안에 되는대로 쑤셔 넣었던 거 전부. 목이 타는 것처럼 쓰리고 손에는 아직도 피가 잔뜩 묻어 있고 하루살이들이 내 뺨을 스치면서 달빛을 향해 날아가고 있어. 그리고 난, 난 아직도 뭐가 뭔지 모르겠어. 나는 왜 벨기에에 왔어? 나는 왜 아르덴에 왔어? 나는 이제 어떻게 하면 되는 거야? 어떻게 해야 이 끔찍한 지루함에서, 고문장치의 신의 무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거야? 역겨워, 모든 게, 지금은 그저 전부 토해내고 싶을 뿐이야. 환각 속에서 나는 계속 그렇게 토했어. 선명한 발소리가 등뒤에서 들려오기 전까진.
“등 두드려 줄까?”
한국어가 아니었어. 그러니까 쿨도어도 아니고 비엔나 봉봉도 아니야. 독일어인데, 내가 아는 사람 중에 독일어로 말을 걸어올 만한 사람은 환각 속에서도 없단 말이지. 그럼 이건 도대체 누굴까. 처참한 몰골로 뒤를 돌아보면 거기에 있는 건,
“어머나.”
나보다 몇 살 더 먹은 것 같은 여자. 깜짝 놀란, 그러나 웃음을 만면에 띤 얼굴에는 하얗게 분칠이 되어 있었어. 네모난 금테 안경을 끼고 반짝이는 짧은 금발에 머리에는 빵모자, 그리고 저 옷은 뭐야? 자수가 들어간……, 수도사 로브? 환각 속에서 걸어 나온 것 같은 형체였지만 어쨌든 분간할 수는 있었어. 이 사람은 환각이 아니야. 숲에서 튀어나온 괴상한 차림의 여자는 자기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어.
“성 비토의 어릿광대야. 뭘 도와줄까?”
아아, 세상에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많구나. 호숫가에 엎드려서 하루살이 떼에 휘감겨서, 나는 단지 그 생각밖에 할 수가 없었어.
 
나보다도 키가 머리 하나는 더 큰 생면부지의 아가씨가 나를 무릎에다가 뉘여 놓고 어디가 아픈지 이것저것 물어보는 걸 가만히 놓아 둔 이유는, 단순히 혼란이 극에 달해서 생각하는 걸 거의 그만두다시피 했기 때문이야. 한밤중에 괴상한 차림으로 숲을 돌아다니는 사람이 제정신일 리 없지만, 딱 봐도 이렇게 맛이 간 녀석은 사실 처음 보거든. 경계심이 안 느껴질 정도로 맛이 가 있다니까. 성 비토의 어릿광대는 또 뭐야?
“머리도 아프니?”
“그래, 아파.”
“성 아가시오께서 항상 너와 함께하시길. 두통의 구난성인이자 군인의 수호성인이시며, 마지막까지 주를 저버리지 않으사 복된 피를 흘리셨으니.”
미친 년……, 아니 내가 할 말은 아니긴 한데, 그래도 내가 미친 년 알아보는 데에는 나름대로 전문가라니까. 특히 지금 이 아가씨가 문제인 게 뭐냐면 터무니없는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주제에 의외로 아는 것도 많고 머리가 멀쩡하게 돌아간다는 거야. 완전히 맛이 간 사람보다 반쯤 간 사람이 훨씬 위험하다고. 이를테면 이런 식으로.
“그리고 성 율리아노 자선가께서 항상 너와 나의 손을 잡아 인도하사, 사망의 어두운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길.”
“그건 또 누구야?”
“성 율리아노 자선가께서는 뱃사공과 아이 없는 사람과 사냥꾼과 살인자의 수호성인이셔.”
그렇게 말하면서 가리키는 건 내 가운 주머니에 들어 있는 고기 써는 칼, 아니 잠깐, 내가 이걸 가져온 거야? 어쩌다가? 아무래도 나한테 당장 필요한 건 정신이상자의 수호성인 같단 말이지. 물론 살인자의 수호성인도 나한테 상당히 필요하긴 한데, 당장은 그럴 생각도 없고 해서 지금은 이렇게 말해 둘 거거든.
“호신용이야. 밤에 숲 속은 위험하잖아.”
그렇게 말했더니 “아하.” 하면서 기분 나쁠 정도로 생긋 웃는 ‘성 비토의 어릿광대’인지 누구인지. 그러면서 또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어. 배는 안 아파? 요즘 어땠어? 많이 피곤하고 그래?
“미안하지만 몇 살쯤 됐어? 동양인 나이는 봐서는 잘 모르겠더라.”
별 걸 다 물어보네.
“흐음, 그 정도 나이인가. 요즘 애들 치고는 살짝 늦긴 하지만……,”
뭐가? 환각 발작이? 요즘 애들 상태도 심각하네.
“아직 초경 안 했지?”
 
뭐?
 
“맞나보네. 그럴 나이잖아. 생리 전에 몸이 많이 안 좋아지는 사람도 많거든. 소녀와 순결과 정절과 강간 피해자의 수호성인이신 성 아그네스시여, 이 아이에게 축복 내리시기를!”
야, 야, 잠깐. 성 아그네스라는 사람이 별로 나를 축복하고 싶지 않을 거라는 건 차치하고서라도, 그러니까 지금 내가 몸에 힘이 없고 온 몸이 아프고 우울하고 정신이 심각하게 예민해진데다가 환각까지 언뜻언뜻 보이는 게 그러니까, 이 미친 아가씨의 놀라울 정도로 합리적인 판단에 따르면,
“이 놈의 뇌는 항상 문제라니까.”
이럴 줄 알았어. 그렇잖아도 제대로 안 돌아가는 뇌가 호르몬의 홍수에 축축하게 젖다 보니까, 거기다가 검사 때문에 정신에 큰 충격까지 받은 상태다 보니까 멋대로 환각을 만들어내기 시작한 거지. 아주 훌륭해. 끝내준다고. 아주 어릴 때부터 뇌는 항상 나를 괴롭히기만 했지. 난 이 몸이 정말 싫어.
“좀 괜찮아? 일어날 수 있겠어?”
뭐, 적어도 이해할 수는 있겠어. 이해할 수 있는 문제니까. 특별히 걱정할 것도 없이 앞으로도 정기적으로 이런 문제를 겪기만 하면 되는 거 아냐. 와아, 지루한 인생에 끔찍하게 지루한 요소가 하나 더 늘었군. 이거 정말로,
갑자기 ‘성 비토의 어릿광대’가 내 오른손목을 꼭 잡아서 겨우 눈치 챘는데, 어느 새 내가 칼을 쥐고 있더라고. 그래, 이젠 이 정도 증상에 놀라는 것도 뭣하다. 이건 아마 정상참작 되지 않을까. 듣기로 월경 전에 도벽이 생기는 사람들도 있다는데 그건 정상참작이 어느 정도 된다더라고. 살인충동도 비슷한 거 아닌가.
“어디서 왔어? 캠프장? 거기까지 바래다줄까?”
그러면 고맙지. 이 상태로 숲을 돌아다니는 건 별로 재밌을 것 같지 않으니까.
“혼자 이렇게 돌아다니면 안 돼. 요즘 이쪽이 흉흉하잖아.”
그래. 재미없는 소문이 돌고 있지. 여기 올 때는 분명히 그게 목적이긴 했는데, 도대체 왜 그걸 목적으로 한 거지. ‘생리 때문에’는 대답이 아니야. 뭔가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거 같은데, 그게 뭐지,
“그래도 앞으로는 괜찮을 거야.”
뭐가 괜찮을 거라고? 상쾌하게 웃는 아가씨의 얼굴이 지나치게 눈부셔서 다시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됐지만 어쨌든 대답은 들어야겠지. ‘성 비토의 어릿광대’는 내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어.
“웃는 얼굴 학살자 말이야. 내가 죽일 거거든.”
 
내가 아픈 몸을 이끌고 이 어두운 숲 속을, 그것도 제정신 나간 여자 손에 들린 손전등 하나에 의지해서 지금 이렇게 걷고 있는 건 단지 그 말 하나 때문이야. 왜 그 말에 끌렸느냐 하면, 그냥, 엄청 수상하잖아. 같이 걸으면서 얘기를 나눠 보니까 점점 더 수상해졌고.
“비토라고 했지. 어디서 왔어?”
“성 비토의 어릿광대라니까. 룩셈부르크에서 왔어. 넌?”
“한국. 남쪽인지 북쪽인지 물어볼 거면, 북쪽 사람들은 보통 여행 안 다녀.”
“남한에서 왔으면 게임 잘 하겠네?”
국가 이미지를 이 따위로 만들어 둔 사람들이 누구야 도대체. 아무래도 게임중독 환자의 수호성인은 아직 없는 모양인데. 그건 그렇고 이 아가씨는 룩셈부르크에서 여기까지 도대체 왜 온 거람.
“웃는 얼굴 학살자를 잡아 죽이려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네.”
그렇게 받아쳤더니 말도 안 되게 빛나는 얼굴로 주장하기를,
“성 비토께 계시를 받았어. 이 세상을 희극으로 바꾸라고! 세상엔 나쁜 놈들이 너무 많지 않아? 그들은 성 율리아노 자선가께서 하셨던 것처럼 회개하지도 않아. 얼마나 비극적인 일이니? 나는 폭풍우와 배우와 개와 간질 발작의 수호성인이신 성 비토의 어릿광대, 악인을 척결하는 망치, 비극을 희극으로 바꾸는 사도야!”
“미쳤다는 소리를 요즘은 굉장히 길게 표현하는구나. 의학 발전이란 놀랍네, 비토.”
“미친 게 아니라 계시를 받은 거라니까. 그리고 성 비토의 어릿광대라고 말했잖아.”
“난 그렇게 긴 이름 부르는 거 싫어한단 말이야. 그래서 비토 너는 지금도 계시를 받아서 학살자를 잡으러 다니는 거야?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사람을? 네 신앙은 존중하고 싶지만, 정말로 그게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해?”
“아니, 그렇게까지 상세한 계시를 받은 적은 없어.”
그러면서 로브 속으로 손을 넣어서 꺼내는 건 하얀 표지의 노트 하나. 펼쳐보니까 안에는 사진이며 메모가 가득. 아, 이건 인터넷에서 본 거다. 시체 사진하고 나무에 새겨진 표식들. 메모는 전부 독일어도 아니고 룩셈부르크어라서 잘 읽히지는 않지만, 어쨌든 제대로 추리하고 있는 것 같네. 굉장히 의외야.
“세상 사람을 상대로는 세상의 지혜가 필요한 법이니까.”
“그래서 어디까지 알아냈는데?”
“음……, 전혀.”
기대한 내가 바보지. 하기야 나간 정신이 추리할 때만 돌아와 주겠냐. 웃지 마, 웃는다고 다 용서될 거면 난 천국에 갈 거라고. 그리고 멍청하게 웃고만 있을 거면 추리 노트에 이거 해석이나 해 주지 그래.
“어, 너도 추리해? 탐정이야?”
그야 탐정은 아니지만 아는 탐정이 하나 있거든. 결국 따라하는 정도지만 그래도 너보단 낫겠지. 그래, 이거라도 하면 좀 덜 지루할지도 모르고. 이유라고 하기도 불분명한 그런 희미한 생각만으로 나는 또 다시 사건에, 그것도 이렇게나 불확실한 사건에 뛰어들게 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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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3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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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 The sore feet song 블랙홀군 04.02 2343
128 짧은 글 댓글2 다움 03.27 2387
127 [자연스러운 문장 연습] 귀머거리 BadwisheS 03.26 2421
126 더러운 이야기 댓글2 기억의꽃 03.23 2449
125 언제든지 돌아와도 괜찮아 [군대간]렌코가없잖아 03.18 2476
124 죽음의 죽음 댓글3 더듬이 03.16 2548
123 현자 더듬이 03.16 2292
122 애드미럴 샬럿 폭신폭신 03.15 2515
121 [어떤 세계의 삼각전쟁] 난투극 - 1 RILAHSF 03.07 2498
120 유정아 댓글1 민간인 03.05 2599
119 LOM Sentimental Blue Velvet Ground 終章 - 상념 Novelistar 03.04 3134
118 [어떤 세계의 삼각전쟁] 관리자 댓글3 RILAHSF 02.27 2539
117 Vergissmeinnicht 블랙홀군 02.26 2469
116 [시?] 첫사랑 Caffeine星人 02.24 2656
115 [어떤 세계의 삼각전쟁] 4월의 전학생 댓글3 RILAHSF 02.22 2786
114 시시한 시 Sir.Cold 02.22 2724
113 전설의 포춘쿠키 댓글1 민간인 02.19 2576
112 [단편] 미네크라프 Caffeine星人 02.17 2642
111 [푸념시] 씻어내자 박정달씨 02.17 2492
110 어느 소녀의 사랑 이야기 댓글2 블랙홀군 02.16 2400
109 나는 너의 미래다 - 끝 민간인 02.14 2449
108 나는 너의 미래다 - 3 민간인 02.12 2485
107 [창작 SF 단편] - 인간, 죽음 Loodiny 02.10 2538
106 Hazelnut 댓글2 블랙홀군 02.09 2519
105 나는 너의 미래다 - 2 민간인 02.07 2621
104 Workerholic-Death In Exams(3) Lester 02.02 2439
103 카펠라시아 기행록 - 1 댓글2 [군대간]렌코가없잖아 02.01 2491
102 [소설제 : I'm Instrument] 종료 & 감평 댓글11 작가의집 02.01 2860
101 [소설제 : I'm Instrument] 갯가재 Novelistar 01.31 2873
100 [소설제 : I'm Instrument] 새벽의... 앨매리 01.31 2554
99 [소설제 : I'm Instrument] 열시까지 BadwisheS 01.30 2480
98 [소설제 : I'm Instrument]Color People Lester 01.30 2847
97 이복남매 이야기 블랙홀군 01.30 2430
96 [창작 SF 단편] - 열역학 댓글3 Loodiny 01.27 2712
95 부고(訃告) 댓글2 가올바랑 01.25 2421
94 마그리트와 메를로 퐁티 그 사이에서. 댓글2 Sir.Cold 01.25 25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