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약속

안샤르베인 3 2,369
남자는 침대에 앉아 몸을 반쯤 기대고 있었다. 얼굴에선 부드러운 미소가 떠나지 않았지만, 병마로 얼룩진 피곤함만은 감출 수 없었다. 옆에서 간호하던 청년은 못마땅하단 표정으로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니까 무리하지 말라고 했잖습니까, 어르신.”
 "하하. 미안하네."

 저한테 미안해할게 아니라고요. 몸 생각 좀 하시란 말입니다. 한참 동안 이어지는 청년의 잔소리를 들으면서 남자는 창 밖을 내다보았다. 햇살이 비스듬히 창문으로 새어 들어왔다. 그림자를 보니 아직 낮이 되려면 멀었군. 그는 밖에서 이슬을 머금고 반짝이는 나뭇잎들을 보았다. 어쩐지 반가운 손님이 올 것만 같은 날이다.
 청년은 창 밖만 바라보고 있는 남자를 보곤 혀를 차고선 주변의 그릇을 치웠다.

 “그럼 전 이만 나가렵니다.”
 “그래. 수고했네.”

 청년이 자리를 털고 일어서려 할 때였다. 문이 쾅 소리를 내며 열렸다.
 “엔시드!”

 문짝이 나가떨어질듯한 큰 소리에 청년도, 누워있던 남자도 고개를 돌렸다. 문을 연 사람의 얼굴은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옆으로 흩날린 흔적이 그대로 남은 머리를 정돈도 않고 거칠게 숨을 몰아 쉬고 있었다. 그가 방금 전까지 전력으로 달려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남자의 표정이 환해졌다. 세월의 흔적은 완전히 피해가지 못했지만 여전히 나이에 비해 젊고, 매력적으로 보이는 웃음이었다. 항상 웃는 표정이었지만 청년은 저런 표정을 처음 본다고 생각했다.

 “뭐야. 아는 사이에요?”
 “그렇다네. 내 오랜 친우지.”

 청년은 미간을 살짝 좁혔다가 폈다. 그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 이해가 될 리 만무했다. 문 앞에 선 사람은 아무리 나이를 많이 잡아봤자 15세쯤이나 될까 싶은 어린 아이였으니까. 하지만 엔시드는 일견 허무맹랑해 보이는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내뱉는 사람이었다. 이번에도 정신이 이상해진 게 틀림없어. 청년은 방금 도착한 손님하고만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엔시드의 눈치를 보곤 고개를 내저으며 자리를 비켰다. 대신 소년에게 주의를 주었다.

 “저 아저씨, 저래 뵈도 속 곯은 노인네야. 오래 붙잡고 피곤하게 하진 말라고.”

소년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청년은 그의 손에 들린 작은 편지지를 보았다. 엔시드가 꼭 부쳐달라고 했던 편지였다. 청년은 어깨를 으쓱하곤 방을 나갔다.
 엔시드의 미소 짓던 얼굴이 조금 풀렸다. 그리곤 대신 한숨을 쉬었다. 소년의 흐트러진 앞머리 사이로 드러난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엔시드는 손을 까딱였다.

 “이리 오게. 크리스.”
 “넌 진짜 나쁜 녀석이야.”

 소년이 원망스런 말을 내뱉었지만 엔시드는 빙그레 웃었다. 크리스의 말에는 그 동안 쌓인 원망, 걱정, 그리고 안도감이 모두 들어 있었다. 저 정도로 끝나는 게 오히려 다행스럽다고 생각했다. 친우들의 눈 앞에서 사라진 이후로 오랫동안 연락 없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게 지내온 세월이 생각났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주먹으로 한 대 치고 싶지 않았을까? 그는 생각했다. 엔시드는 자세를 고쳐 똑바로 앉았다.

 “그래. 벌써 자넬 못 본지 10년이나 됐군.”
 “어떻게... 한번도 연락도 안 하고...”

 울음이 터질까봐 그런지 크리스는 입술을 꼭 물고 있었다. 엔시드는 손을 뻗어 그의 눈가를 매만졌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지만 새삼스레 그를 처음 만났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와 거의 변하지 않았어. 기억 속의 모습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는 게 반가웠다. 그의 원래 종족을 생각하면 오히려 빠르게 변한다는 게 더 이상할 테지만.
 크리스는 새침한 표정으로 쏘아보려고 노력하는 듯했다. 하지만 엔시드의 눈에는 귀여운 아이의 투정으로 보일 뿐이었다. 그런 시선을 느꼈는지 크리스도 이내 눈에 줬던 힘을 풀었다.

 “이러고 있으니 옛날 생각나는군 그래.”

 크리스는 그 말에 엔시드를 올려다보았다. 엔시드는 기억을 떠올리려는 듯 눈을 잠시 위로 움직였다.

 “자네를 만나고 나서 정말 많은 일이 있지 않았나.”

 크리스도 그날의 일들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첫 만남부터 특이했는걸. 엔시드의 양 우리에 구멍을 내놨으니까. 최악의 인상으로 남아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지만, 그 계기가 오히려 둘을 친구로 만들어 주었다.
엔시드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역시 대부분은 아는 이야기였다. 친구가 된 그 날로부터 엔시드가 혼자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 그들은 쭉 함께였다. 엔시드와 귀족 아가씨의 야반도주, 그의 아들이 태어난 일, 엔시드가 세상을 바꾸고 말겠다는 의지를 표출했을 때, 동료를 구할 때, 마침내 그를 왕으로 만들었던 일. 그 모두에 크리스는 관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엔시드는 별안간 사라졌다. 왕위는 그의 아들, 에반에게 넘긴다는 작은 쪽지만 남기고.
사실 이유는 알고 있었다. 엔시드는 그 자리를 힘겨워했다. 자신이 정말로 원한 것은 이게 아니라며. 여행을 하고 싶다고, 수 없이 떠나고 싶다고 크리스에게 남몰래 말했다. 하지만 왜 10년이나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않은 걸까? 얼마든지 그를 도와 줄 친구들에게.
크리스는 조용히 엔시드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정리했다.

“그러고 보니 너무 내 이야기만 했군. 자네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을 텐데.”
“아냐, 내가 궁금한 건 하나뿐이야.”

엔시드는 빙그레 웃었다. 하지만 어딘가 서글픈 웃음이었다. 크리스가 물어볼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가 입을 열었다.

“난 곧, 죽을 걸세.”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에 크리스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삽시간에 경악으로 물든 그의 얼굴은 쉽사리 풀릴 줄 몰랐다.
그와는 반대로 엔시드의 얼굴은 평온했다. 오히려 털어놓고 속이 시원해진 것처럼 보였다. 크리스는 말을 잇질 못하고 더듬대다가 한참 뒤에 입을 열었다.

“죽는……다니?”
“말 그대로라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어.”

장난스럽기는커녕 초연한 표정인 엔시드를 보고 크리스는 그게 거짓이 아님을 알았다. 그러나 인정할 수 없었다. 혼란스러웠다. 이제서야 만났는데. 다시 손이 닿지 않는 먼 곳으로 가버린다니.
눈물이 방울져 떨어지는 것도 모른 채 크리스는 엔시드를 바라보았다. 엔시드는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실은 이미 그때부터 몸이 안 좋았다네.”

엔시드는 이야기했다. 떠나기로 결심한 10년 전부터 몸이 급격하게 나빠졌다고. 시한부 인생임을 선고 받았다고 했다. 도저히 그들 앞에서 죽을 자신이 없어 남몰래 쪽지만 놓고 떠났다. 자신을 짓누르는 중압감에서 해방되어서인지, 좋은 공기를 많이 마시게 되어서인지는 몰라도 당초 의사가 예상했던 것보다는 오래 살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한계라고 했다.

“이 집 청년이 잘 보살펴줘서 그나마 이렇게 살고 있다네. 뭐, 환갑 정도면 꽤 오래 산 것 아닌가?”

  농담하듯 넘겨보려던 엔시드의 말은 거기서 멈췄다.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은 대충 닦는다고 멈춰지지 않았다. 엔시드는 크리스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나 이내 손을 내렸다. 어차피 자신이 달랜다고 해서 멈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안쓰러워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것 외에 다른 방도는 없었다.
  크리스는 한참을 울었다. 눈가가 새빨갛게 물든 것을 보니 자연히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엔시드는 조용히 크리스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그래서 말인데, 크리사오르.”

엔시드가 자신을 본명으로 부를 때는 반드시 이유가 있었다. 크리스는 눈을 잠시 깜빡였다.

“한가지 부탁 하나 함세.”
“…… 뭔데?”

잠시 머뭇거리다가 크리스가 입을 열었다. 엔시드는 잠깐 뜸을 들였다.

“내가 없는 동안, 에반을…….”
“그건 지금도 하고 있는 일이야.”

크리스가 말을 잘랐다. 그의 눈에 자신이 비쳤다. 머뭇거리고 있는 모습. 친구에게 이런 짐을 지워도 될까 하는 생각. 그리고 크리스의 눈도 보였다. 마침내 모든 것을 받아들인 모습이었다.
가장 약한 것 같지만 가장 강한 친구. 잠시 그의 본 모습을 잊고 있었다는 게 생각났다. 엔시드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이 나라를 부탁하네.”
“……. 엔시드…….”
“그래. 알고 있네.”

크리사오르는 본래대로라면 진작 이 일에서 손을 뗐어야 할 위치였다. 인간 세계가 감당할 수 없는 이종족. 그 중에서도 가장 강하다는 드래곤의 수장. 하지만 지금 엔시드 자신은 그에게 더 큰 짐을 지우려 한다.

“계속 봐달라는 건 아닐세. 이 나라가 가망이 없다면……. 차라리 자네의 손으로…….”
“하, 할게.”

크리스의 입에서 성급한 대답이 튀어나왔다. 엔시드는 서글프게 웃었다. 끝까지 도와준 친구에게 족쇄를 채우는 격이었다. 그걸 모르지 않았음에도 자신은 친구에게 약속을 받아냈다. 잠시나마 그런 자신이 혐오스럽게 느껴졌다.
아마 크리스도 이미 알고 있겠지. 자신이 무슨 의도로 말을 했는지. 엔시드는 눈을 내리깔았다.

“괜찮아 엔시드.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니까.”

크리스가 엔시드의 비쩍 마른 손을 잡았다. 얼굴과는 달리 세월의 흔적을 감출 수 없는 나이 든 손이었다. 크리스는 잠시 목이 메는 듯 말을 삼켰다가 다시 말했다.

“그러니까 미안해하지 마.”

엔시드가 그리 말하지 않았더라도 크리스는 반드시 지켜낼 생각이었다. 이 나라는 그가 남긴 흔적이다. 자식이며 유품이다. 그와 함께 했던 우리들의 우정의 증표다. 엔시드가 죽더라도 우리가 한 일은 역사 속에 남으리라.
엔시드는 가만히 반대쪽 손으로 크리스의 뺨을 쓸어주었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반드시, 자네가 죽기 전에 돌아오겠네.”
“언제 돌아올지 어떻게 알고?”
“자네 수명은 길지 않나. 언젠간 다시 만날 일이 있겠지.”

엔시드는 씨익 웃었다. 언젠가 본 적이 있었던 웃음이었다. 장난스럽지만 진심이 담겨 있었다. 크리스는 다시 반박하려다 말문이 막힌 채로 그를 보았다. 왠지 엔시드라면 가능할 것 같았다. 자신보다 한참 능력이 부족한 엔시드였지만, 어떤 난관이 닥치더라도 어떻게든 해내던 친구였다.
엔시드는 거둔 손을 다시 내밀었다. 그리고 새끼손가락을 제외한 나머지 손가락을 접었다.
 
“약속함세.”

크리스도 얼떨결에 반대쪽 손을 내밀었다. 새끼손가락이 맞닿았고, 고리가 걸렸다.
손이 풀린 뒤, 엔시드는 다시 웃으며 편안하게 자리에 누웠다.

“역시 이렇게 해 두니 속이 시원하군.”
“엔시드…….”

크리스는 엔시드를 내려다보았다. 금방이라도 멀리 갈 것 같은 친구의 옆을 지키고 싶어서.
엔시드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고개가 떨어졌다.
 
*********************
“후우, 이제 끝이구나.”

펜의 사각거리던 움직임이 멈췄다. 크리스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창문 너머로 잘 가꿔진 정원이 보였다. 성이 너무 낡아서 다시 건설한지도 벌써 수백 년이 넘었건만, 여전히 상당한 위엄을 간직하고 있는 성이었다.
 이 곳을 보면 옛날 생각이 떠오른단 말이지. 크리스는 미소지었다. 벌써 약속한 지 수천 년이 넘었고, 어리디 어리던 소년은 청년의 모습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엔시드가 세운 나라는 아직도 건재했다. 이제는 전설로 남은 이야기가 되었지만, 엔시드와 친우들, 자신의 흔적은 여전히 나라 곳곳에 남아 있었다.
 크리스는 다시 종이로 시선을 옮겼다. 막 펜을 손에 들고 서명하려는데 어깨에 다른 사람의 손이 닿았다. 크리스가 고개를 돌렸다.

 “왔어, 페르디?”
 “여전히 열심이로군. 크리스.”

 페르디가 씩 웃었다. 크리스도 같이 웃었다. 페르디의 웃음은 옛날 엔시드의 것과 똑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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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대사 하나하나가 머릿속에서 재생되네요.
안샤르베인
감사합니다. 편하게 읽히나요?
전후 얘기를 다 못 읽어서 좀 잘리긴 했지만, 이것만 떼놓고 읽기도 편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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