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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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이야기는 내가 2년 전에 겪은 이별 이야기이다.
 회사를 옮기기 전이었다. 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동료의 소개를 받고 여자를 만났다. 나보다 한 살 아래로 근처 직장에 다니던 사람이었다. 조금 경솔했던 것이, 결혼까지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인지 물어봤어야 했다. 슬슬 그럴 나이이기도 하니 말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는데, 당연히 그런 사람을 소개시켜주리라는 내 머릿속의 믿음이 있었다. 묻기에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는 막연한 벽에 막히기도 했고. 그런 것들이 합쳐져, 내 마음대로 좋게 생각했다. 결과도 나쁘지 않았다. 헤어진 걸 생각하면 최악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사귀긴 했었으니까. 그 이후로 이직을 했고, 모든 것들이 다 지나버린 일들이 되었으니까.
 이재은, 소개팅녀의 이름이었다. 스물 일곱. 연애는 좋지만 결혼은 생각이 없던. 나를 가장 사랑한다는 뻔한 거짓말조차 하지 않는. 융통성 없다고도 할 수 있으며 동시에 똑부러지다고도 할 수 있는. 연한 금발 염색, 숏컷. 옅은 화장, 볼터치. 양 귓볼의 피어싱. 말투는 다른 사람들보다 빠르며, 또박또박하다. 재은이는 분명한 것을 좋아했고, 막연한 욕심을 멀리 밀쳐낼 수도 있었다. 그런 것들이 재은이었다. 하나의 부분을 떠올리면 다른 하나가 떠오르는 식으로 재은이를 떠올린다. 어느 소설에서도 이런 연상법에 대해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아무튼, 그리고.
 퉁명스런 표정. 뭐요? 그래요? 아 그렇구나. 그래서요? 어떻게 됐는데요? 재은이의 단답. 그렇다고 재은이가 나를 무시하거나, 이기적으로 행동하지는 않는다. 재은이의 표정과 억양을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재은이의 단답은 대부분 질문이며, 동시에 나에 대한 관심이기도 하다. 도리어 어른스럽다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짧은 말로 대화를 주도하며, 내게 말하도록 이끈다. 내가 마치 어린아이가 된 듯한 마음에 약이 오를 때도 있다. 한 번은 부루퉁해져서, 제대로 들은 거야? 라며 확인해본 적이 있었다. 재은이는 다 기억했다. 도리어 당황한 쪽은 나였다. 화가 난거야? 재은이는 업무와 관련된 탭을 끄고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냥 좀 그랬어. 나는 그렇게 대답했던 듯 싶다.
 애석하게도 우리는 일 년 정도 사귀고 말았다. 카페-영화관-회사 근처를 뱅뱅 도는 지리멸렬한 데이트 코스 때문은 아니다. 내 말 때문이었다.
 회사 근처 이디야 카페에서였다. 재은이는 탭을 만지며 내 이야기를 듣고 있었고, 나는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아마 인터넷에 올라온 카톡 대화 이슈에 대해 얘기했던 듯 싶다. 어떤 커플 이야기였는데, 피자 한 조각 가지고, 정말 별 것도 아닌 걸로 헤어지네 마네 싸우는 내용이었다.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면 피자 한조각이었거든?" 내가 말했다. "웃긴 건 피자 자체는 중요한 게 아냐. 피자에 무슨 소스를 뿌리느냐에 대한 건데, 사실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재은이가 말했다. "중요할 수도 있지."
 "뭐 그런가. 음. 뭐 그럴 수도 있는데, 그럴 거면 미리 말을 해야 되는 거 아닌가?" 나는 남자를 편들면서 얘기했던 듯 싶다. "웃기잖아. 그리고 깜빡할 수도 있지. 유정아 안 그래?"
 그 때 재은이는 고개를 들었다.
 "뭐라고?"
 "어." 나도 말을 멈추었다. 순간 내가 했던 말을 되짚었다. "어, 미안……." 나는 말문이 막혔다. 재은이는 내게 물었다.
 "유정이는 누구야?"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전 여자친구." 나는 궁색하게 덧붙였다. "그냥 잘못 나왔어."
 "그래?"
 "미안……."
 하지만 재은이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게 잘못 나올 수도 있어?"
 재은이는 추궁했다. 나는 추궁이 싫었다. 나는 실수로 말했고, 실수를 인정했는데, 상대는 뭔가 다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잘못 나왔어. 다른 이유는 없어, 정말이야." 사실이 그런데 무엇을 더 어떻게 말하라는 것인가. 재은이는 질문을 바꿨다.
 "왜 거기서 그 이름이 나오는 건데?"
 갑자기 유정이의 이름은, 해리포터의 볼드모트와 같은 취급을 받았다. 그렇다고 유정이가 마법사의 세계를 파괴하는 대악당은 아니다. 재은이는 나를 빤히 보았다. 마치 감당도 되지 않는 사고를 친 아들을 쳐다보는 어머니같은 혹독한 눈이었다. 무슨 일을 저지른 거니? 그 때 아들의 말은 얼마나 궁색해지며, 그 궁색함을 알기에 얼마나 말이 줄어드는가. 재은이는 다시 고개를 내려 탭을 바라보았다. 나는 하던 대화를 않았다. 그 날 대화 역시 그걸로 끝이었다.
 재은이와 다시 전처럼 얘기하기까지 며칠이 걸렸다. 재은이는 내 실수를 다시 꺼내지 않았다.
 넉 달이 지났다. 우리는 처음으로 여행을 떠났다. 대천이었다. 조개구이를 먹었고, 앞에는 다 마신 소주병이 두 개였다. 우리 둘 다 취하지 않았다. 취하지는 않았는데, 무슨 이야기들을 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배경만 달라졌을 뿐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나는 사귀면서 이의 표정이 크게 달라지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재은이는 여전히 옆에서 황제펭귄들이 대학살을 당해도 꿈쩍하지 않을 표정이었다.
 바다를 볼 때도 재은이는 그냥 담담했다. 사귄지 일 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나는 재은이의 마음을 읽기가 어려웠다. 오직 짐작할 뿐이었고, 짐작과 크게 벗어나지 않는 행동을 한 것이 가까운 사이의 증명이라고 생각했다.
 바다에 대한 이야기를 했던 듯 싶다. 대천에 관해서, 대천과 관련된 경험에 대해서, 바다의 경험에 관해서 얘기했던 듯 싶다. 이번엔 재은이도 좀 말을 했다. 정동진에 갔던 얘기였다. 대학교 때 친구랑 둘이 갔었다고 했다.
 "해돋이는 못봤어." 재은이가 말했다. "저녁에 갔거든."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보면 되는 거 아닌가?" 내가 물었다.
 "피곤해서 잤지."
 "아아 그렇구나."
 "꼭 해돋이를 보러간 건 아니니까." 재은이가 말했다. "바다 가고 싶었어 그냥."
 "사람 많았어?"
 "별로 없더라. 겨울 바다 보러 오는 사람이 별로 없었어."
 "아아. 그래도 겨울바다에 사람이 많으면 이상할 거야. 그치 않아?" 나는 물었다. "바다 말고 또 볼 거 있어?"
 "어, 응. 큰 모래시계도 있고, 시간 박물관도 있어. 일단 우리가 해변에 갈 일 자체가 별로 없잖아. 그러니까 해변에만 가도 신기한 거지."
 나는 초장과 치즈에 푹 젖은 키조개를 꺼내 먹었다. 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도 나중에 같이 가자."
 "그러던지."
 "정동진이 좋아, 다른 해변가도 좋아?"
 "정동진 아니어도 돼."
 "울릉도나 독도 이런데 가볼까?"
 "또 오버하지 말고."
 "알았어. 다른데." 나는 재은이에게서 약속을 끌어냈다. 막연한 약속이어도 좋았다. 미래를 계획함으로써, 현재 함께하는 기분이 들었다. "정동진 갈 때 뭐 타고 갔어?"
 "기차."
 "기차역이 있어?"
 "역 앞이 바로 해변이야."
 "와."
 재은이는 말을 이어나가는 대신, 탭을 꺼냈다. 나는 말했다.
 "대천에서 하루만 더 있고 가고 싶다. 너는?"
 "응, 나도."
 그리고 그 때, 갑자기 뭐에 홀린 듯이 말이 잘못나왔다.
 "유정아."
 재은이가 고개를 들었다.
 "방금 뭐라고 한 거야?"
 "아니," 나는 당황했다. "잘못나왔어. 정말이야."
 "내가 잘못들은 거 아니지?"
 "잘못 말한거야 내가."
 "어쨌든 그렇게 말한 거네?"
 "미안해."
 "전에도 이런 적 있었던 것 같은데."
 나는 재은이에게 몇 번이고 사과했다. 그러나 재은이는 내 말을 듣지 않았다.
 "나 가야겠어."
 "잘못 말한거야."
 "너는 하루 있다 와도 돼."
 나는 유정이의 이름을 말하는 대신 재은이를 부르며, 무슨 말을 하려고 했었던가. 머릿속에 엉뚱한 질문이 떠올랐다. 머리와 혓뿌리와 목덜미와 가슴팍 저 안쪽에서 종잡을 수 없는 유격전이 벌어졌다. 말들이 길을 잃었다. 나는 택시를 타려던 재은이를 붙잡았으나 오래 잡지 못했다. 재은이는 나를 보았다. 당신이 왜, 누구시길래, 날 이렇게 붙잡으시는 건가요? 무언의 명백한 거리두기였다. 우리는 단숨에 아무 것도 아닌 사이가 되었다.
 재은이는 떠났고, 우리는 거기서 끝이었다.
 재은이에게 연락하려는 순간, 이상한 일이었다. 재은이와 헤어지니 유정이의 미소가 떠올랐다. 유정이는 아주 오래 전에 만났었다. 실은 유정이는 재은이와 사귀는 기간에도 떠올랐었다. 헤어질 즈음 내게 화를 내던 모습, 눈금으로 재야하는 사랑마저 소진한, 무슨 볼 일 있어? 나 바쁜데, 하던 모습이었다. 오래 전이라 바스러기같았고, 심지어 상처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재은이와 헤어진 그 때 유정이의 모습이 다시 떠오른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떠오른 유정이의 모습은 전과 달랐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치던 장난, 시내를 걸어가며 나눈 농담, 내게만 보여주었던 눈웃음, 유정이의 아이같음이 떠올랐다.
 나는 헤어진 사람들을 다시 만나지 못했다. 유정이도 재은이도 보지 못했다. 헤어진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며 그들을 구분짓던 특징만이 남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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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Novelistar
잘 읽었습니다.
슬픈 조각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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