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SF 단편] - 인간, 죽음

Loodiny 0 2,506

간신히 제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내가 차가운 방바닥에 널브러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감각이 계속 쑤셔왔고, 온몸의 관절이 삐걱거렸다. 어젯밤, 쾌락에 취해서 인사불성인 상태로 집에 돌아온 후 그대로 잠들어 버린 모양이었다.

시계를 보지 않더라도 출근 시간이 한참 지났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늘어지려 하는 몸을 바싹 조여 일으켰다. 팔다리를 움직여 보니 별다른 이상은 없었다. 일단은 아침 식사부터. 책상 위에 대롱이 돌돌 말린 채로 내팽개쳐 있는 링거 주사를 왼팔에 꽂고 컴퓨터를 켰다. 부팅이 완료되자마자 재빨리 병원 컴퓨터에 접속했다. ‘오늘은 사정상 10시 30분에 개원합니다. 대단히 죄송합니다.’라는 글을 병원 전광판에 띄웠다. 손님 몇 명을 놓칠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포도당 주사로 아침식사를 때우면서 뉴스를 봤다. 핵융합 발전소 시공 시작. 은행을 해킹하려고 든 일당 체포. 사상 최악의 실업률. 그리고 점점 격해지는 네오 러다이트 시위대. 그들은 이제 닥치는 대로 로봇들을 때려 부수고 있다고 한다.

인간의 역할을 대체하다 못해, 인간을 뛰어넘어 버린 기계들은 빠른 속도로 인간의 일을 차지했고, 당연히 단순 노동을 하던 사람들은 대부분 실직자가 되었다. 역시 당연하게도, 분노한 사람들은 거리로 뛰쳐나왔다. 이 모든 사회모순은 기계들 때문이라고 단정하면서. 해묵은 복고주의와 기계 문명 비판을 내세우며, 그들은 로봇과 사이보그와 네크로이드(Necroid)들을 척결하려 드는 것이다.

이제 그들은 닥치는 대로 로봇을 파괴하는 폭도로 변한 모양이다. 게다가 그 수가 만만치 않아 경찰도 손수무책이라고 하니, 슬슬 이 동네도 몸을 사려야 할 것이다. 이 동네에는 불법 사이보그 등등이 판치니까.

머리카락이 없다는 것의 유일한 장점은, 머리를 감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식사가 끝나자마자, 나는 컴퓨터를 끄고 코트를 걸친 다음 집을 나섰다. 바깥 기온은 집 안과 비슷했다. 판잣집에 무슨 보온보냉을 바랄까. 우중충한 잿빛 슬레이트가 삐걱거리는 것을 듣고 바람이 부는 것을 알았다.

판자촌 골목길에서도 활기찰 수 있는 사람은 때가 꼬질꼬질한 옷을 입은 꼬맹이들뿐이다. 일자리가 없는 어른들은 담배 연기만을 뱉어내고 있고, 언제 감옥에 끌려갈지 모르는 불법 사이보그들은 언제나 공포에 싸인 피곤한 모습이다. 아예 인간조차 아닌, 네크로이드 한 기가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다. 모두들 고개를 푹 숙인 채로 터벅터벅 걸어간다. 그건 나도 다르지 않다.

여기는 망자들의 땅, 인간의 삶에서 밀려난 자들의 땅이니까.

특히 네크로이드들은, 비유적인 의미가 아니라 진짜로 ‘인간’에서 밀려난 자들이다.

이미 죽어버린 기계의 몸. 죽음이 두려워서, 끝이 무서워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 소름 끼쳐서, 자신의 뇌만을 살려낸 ‘한때 사람이었던 것’들. 뇌는 보존액에 잠겨, 정교한 기계의 몸을 움직이는 컴퓨터가 된다. 망자는 디지털 데이터로나마 삶을 다시 구가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곳에 안식은 없다. 데이터로서 전송된 정보를 인간과 마찬가지로 처리할 따름인 로봇이, 과연 진짜 인간일까?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려는 인간은 수도 없이 많을 텐데, 그들을 모조리 살려낼 수 있을 만큼 세상은 넓고 풍요로운가? 인간들이 낸 대답은, ‘둘 다 아니다’였다. 사고를 재현한 기계는 인간이 아니다. 인간이 죽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망자들로 세상이 가득 차 버릴 것이다. 때문에 네크로이드는 존재 자체가 불법이다. 인간으로서 취급되지 않는다. 삶의 모든 증거를 박탈당하고, 인간으로서의 모든 권리를 잃어버린 채 살아가야 한다. 누군가에게 파괴되어도 살인이 성립되지 않는다. 경찰들은 문제를 일으킨 네크로이드들을 ‘불량 AI로서’ 처분한다.

그러니까, 죽음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일 뿐이다. 나는 그걸 네크로이드의 삶을 보고서야 깨달았다.



10시 27분에 병원에 도착해서 문을 열었다. 병원이라고 해도 작은 창고 같은 건물로, 의사 면허가 한참 전에 사라진 무면허 의사가 일하기엔 딱 좋은 곳이다. 탁상 하나, 의자 둘, 몇 가지 의료 기구만이 있는 이 살풍경한 배경에 손님들은 오히려 안심한다.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렸지만 통 손님은 오지 않았다. 할 일이 없다 보니 컴퓨터를 켜서 마작이나 하고 있었다. 점심때가 지나서야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박 아저씨다. 금속으로 만들어진 오른팔을 덜렁거리며 들어온 그가 큰 목소리로 인사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꺼?”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내 인사에 그가 걸어왔다. 의자에 철퍼덕 앉는 그의 모습은 엉덩이에 무거운 추가 매달려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지친 몸이 피로에 가라앉는 것 같기도 했다.

“여기 오른팔, 안에서 피가 좀 나서 그럽니더.”

그는 오른팔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수많은 공구들이 수납되어 있는, 그의 로봇 팔이었다.

보다시피, 박 아저씨는 사이보그다.

평범하지 않을 정도로 가난했다. 때문에 최저임금조차 받지 못하고, 열악한 환경에서 막노동을 하면서 살아갔다. 사실 막노동이라도 일자리가 있으면 다행이었다. 공사판이건 어디건, 대부분의 단순 노동이 기계들의 차지가 되어버렸으니까. 그리고 그 열악한 환경 속에서, 박 아저씨는 오른팔이 잘리는 사고를 당했다.

팔이 잘렸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일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 생각다 못한 박 아저씨는 나에게 왔다. 그는 잘려진 팔을 기계로 대체할 수 있냐고 물었고, 나는 그의 팔에 신경 전류를 전달하는 소켓을 박았다. 대금은 그의 신장 한 쪽.

하지만 그 로봇 팔도 결국엔 싸구려 물건. 금속과 살이 꽉 맞물리지도 않고, 온도 변화나 누적된 충격 때문에 틈이 벌어지기도 하고, 게다가 이것저것 로봇용 정밀공구를 달아서 험하게 쓰고 있으니 성할 리가 없다.

“최근에 어디에 오른팔을 부딪치거나 한 적 있었나요?”

“에, 공사장에서 옮겨지던 상자에 부딪치긴 했는데…….”

“어디 봅시다.”

아무래도 강한 충격에 로봇 팔이 흔들렸고, 그 때문에 살 안에 박아 넣은 심이 조금 흔들리면서 피가 난 모양이었다. 팔 자체가 조금 부어 있었다. 잘못 만지기만 해도 아플 것이다. 여기서 팔이 더 흔들리면 아픈 건 둘째 치고 상처가 아물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의사라고 해도 별다른 치료를 해 주는 건 무리다. 고작해야 소독을 하고, 냉찜질을 한 다음 흔들리지 않도록 압박붕대로 감아 주는 정도밖에 할 수 없다.

붕대를 감아 주는 중에, 박 아저씨가 말을 걸었다.

“이거, 한동안은 일 못 합니꺼?”

“네, 함부로 움직였다간 또 흔들릴 겁니다. 다 나을 때까지만 일 좀 쉬셔야겠습니다.”

박 아저씨는 한숨을 쉬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그에게 일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치명적이다. 하지만 박 아저씨는 나의 예상과는 다른 말을 했다.

“뭐, 어짜피 공사장도 작살나서 한동안은 일 못 나가니 잘 된 일이지만서도 영 찝찝하네예.”

“공사장이 작살나다니요?”

나는 물었다. 그러자 박 아저씨는 한숨을 한 번 더 쉬었다. 함부로 움직이면 안 된다는 지적을 받은 오른손은 그대로 둔 채, 왼손만을 이리저리 내저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그게, 어제 저기 멀리(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동쪽을 가리켰다) 공사장에서 일하고 있었는디, 갑자기 주변이 소란스러워진 거 아닙니꺼. 딱 보니까 네오 러다이튼가 뭔가 하는 패거리들이 몰려 오길래 뒤도 안 돌아보고 뛰었심더. 그러다가 팔도 퍽 하고 박고, 그러고도 안 멈추고 골목길 가서 숨었지예.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다시 돌아가 보니까, 이것저것 기계들은 다 박살나 있어서, 공사는 중지되고 나중에 인력 다시 모은다네예. 여기만 그런 게 아니라 주변 공사장이 다 이 모양이라, 천지가 반쪼가리가 나도 한동안 일거리가 생길 일은 없겠심더. 하도 열불이 나서 술 좀 마시고 잠들었는데, 깨 보니까 팔이 욱신욱신 아파서 온 겁니더. 이제 한동안은 뭘 먹고 살지 막막합니더, 후…….”

그의 세 번째 한숨에는 깊은 절망이 깃들어 있었다. 나는 한순간 진료비를 받지 말까 하는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금방 제정신을 차리고, 이제는 잘 쓰이지도 않는 현금을 박 아저씨에게서 받았다. 혼자서 살아남기조차 힘들고, 범죄가 판을 치는 이 동네에선 동정은 금물이다. 박 아저씨의 사정 따윈 내가 알 바 아니다.



그 이후로 밤늦게까지 파리만 날렸다. 네오 러다이트 시위가 있었다면, 다친 사이보그들이 몇 명 더 있었을 텐데 통 손님이 없었다. 아마 늦은 개원으로 인해 다들 다른 병원으로 찾아갔을 것이다. 나 말고도 이 동네에 무면허 의사는 한두 명 더 있으니. 문을 잠그며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들겼다. 단지 살아 있기 위해서라도 돈이 필요하다는 당연한 사실을 저주하면서.

머릿속에 직접 울려 퍼지는 블루스를 들으며 걸음을 옮겼다. 주변의 잡음을 완전히 지워버리고, 사고를 깔끔히 메워버리는 우울한 기타 리듬. 죽은 자들에 대한 연민을 읊조리며, 그들이 일어났으면 하는 헛된 소망을 품는다. 조소한다. 이 노래를 지은 사람은 정말로 망자들이 다시 살아나는 세상이 올 것이라고 생각이나 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이 판자촌을 봐라. 설사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고 해도, 죽은 사람이 다시 일어설 수는 없다. 단지 비참히 기어 다닐 뿐이다.

그런 사색을 하면서도 기타는 계속 리듬을 연주했고, 죽은 가수는 죽은 노래를 부른다. 반복 재생되는 노래 때문에 내 청각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고, 나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죽은 자들의 정적도, 산 자들의 소란도.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흥분한 군중이 길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연령대는 다양해서, 막 학교를 졸업했을 법한 젊은이부터 중년이라고 부르기도 힘들 아저씨도 있었다. 대부분은 남자였지만 일부 여자도 섞여 있었다. 모두들 허름하고 낡은 옷을 입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금속 또는 탄소 소재 파이프들, 화염병, 그리고 무형의 분노와 파괴 충동. 그들은 나를 노려보았다. 거리는 어느 정도 있었지만, 나는 도망치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내가 도망치려 들기도 전에 여댓 명이 나에게 덤벼들었다. 나는 몸을 돌려 달렸지만, 숨이 가빠지기도 전에 따라잡혔다.

파이프가 휘둘러지고,


금속과 금속이 부딪치며, 쇠파이프가 부르르 떨렸다.

고통을 대신하는 창이 의식 속에 나타난다. 외부로부터의 강한 충격 확인. 부위는 등. 아프지는 않았지만, 관성 센서에는 내가 가해진 강력한 충격 때문에 넘어지고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바닥에 두부가 처박혔다. 그 순간 생각해냈다. 나는 폐가 없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숨이 가빠질 리도 없다는 것을.



지금 생각해 보면, 평범한 삶이었다고 생각한다.

평범한 죽음이었기도 했고.

사인도 흔하디흔한 교통 사고였다.

보통의 죽음이 그렇듯이, 허무하게 몸이 부서졌다.

죽음은 모두에게 평등했다, 젊음도 늙음도 가리지 않을 만큼.


하지만 그 때의 난 내가 너무 이른 나이에 죽었다고 생각했다. 내 죽음이 억울하다고 생각했다. 다시 살고 싶다고, 살아난다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웃긴 생각이다. 죽음에 나이가 있겠는가. 어느 누가 제 나이가 되었다고 억울하지 않게, 후회 없이 죽었겠는가. 당장에 그리 이른 나이도 아니었다. 하지만 난 그 모든 것을 몰랐다. 어쩌면 그걸 알았음에도, 죽음이 너무 무서워서 도망친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내 뇌를 뽑았고, 수많은 자잘한 기계로 이루어진 생명유지장치 안에 넣었다. 그리고 ‘나’에게 눈을 달았고, 귀를 달았으며, 팔을, 그리고 다리를 달았다.

그래서, 나는 ‘나’가 되었다.

처음 움직였을 땐 기뻤다. 비록 뇌뿐이지만, 포도당을 먹어치우고 산소를 호흡할 수 있다는 사실이 행복했다.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하지만 그 행복은 오래 가지 않았다. 법적으로 사망 처리되어 있기 때문에 살던 집에서 쫓겨났고, 의사 면허도 사라졌다. 동료들, 친구들은 물론 가족들조차도 날 버렸다. 지나가던 취객이 갑자기 “이 빌어먹을 시체 새끼야!” 라고 소리치며 내 다리를 부서뜨리고, 경찰서에 신고했더니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하고 “인공지능은 폭행의 대상이 될 수도, 경찰에 신고를 할 수도 없습니다. 또 다시 전화하면 공무 방해로 간주, 폐기처분하겠습니다.” 라는 사무적인 말을 들었을 때 알아챘다.

나는 인간이 아니다. 한때 ‘인간이었던’ 무언가일 뿐이다.

나는 망령. 이미 죽어버린 누군가의, 살고 싶다는 의지가 남긴 사고체계.

나는 뇌에 깃든 단순한 의식이 아니었었다. 나는 인간이었다. 탄소, 수소, 산소, 질소를 베이스로 하여, 복잡하게 얽히고 얽혀 만들어낸 거대한 유기체였다. 내 몸에는 피가 흘렀다. 지금의 ‘나’는 인간이 아니다. 강철의 몸에는 피 대신 윤활유가 흐른다. 아무리 똑같은 정신을 가졌다고 해도, 과거와 지금의 나는 그 점에서 확실히 다르다.

그러니까, 나는 인간 속에서는 살아갈 수 없다. 인간이 아닌 자들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이미 죽은 자들, 이미 인간성을 잃은 사람들 속에서. 나와 같은 네크로이드들, 불법 사이보그들, 희망조차 잃은 극빈자들 속에서.

나는 판자촌으로 이사했다. 모아 놓은 돈을 간신히 빼내는 데 성공해서, 비만 막을 수 있는 허름한 집, 몇 가지 생필품, 병원으로 쓸 창고, 몇 가지 간단한 의료 기구를 샀다.

나에게도 아직 몇 가지 남아 있는 것이 있었다. 의사 면허가 사라졌지만 기술은 여전히 뇌 속에 남아 있었고, 장사꾼들은 나보다 훨씬 더 흉측한 괴물이라도 돈만 준다면 물건을 넘겼다. 나는 무허가 의사로, 이 마을에서 함께 살아가는 망령들을 치료하고 돈을 벌었다. 그 돈으로 하루하루 몸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부품, 윤활유, 전기, 포도당 등을 구입했다.

그렇게, 인간이 아니게 된 나는, 망령으로서 살아남았다.



누군가가 나에게 파이프를 휘둘렀다. 몇 번인지도 모를 흔들림이 나를 덮쳤다. 둘러싼 사람들은 차례차례 나를 파이프로 때렸고, 발로 마구 밟아댔다. 뇌가 들어있는 두부를 때리지 않는 것은, 그나마도 ‘나’를 완전히 죽이는 것을 망설이고 있어서일까. 하지만 그것도 물건을 완전히 부수는 것을 두려워하는 나약한 인간의 면모일 뿐이다. 살인을 주저하는 것도 아니고, 자비를 베푸는 것도 아니다.

이 와중에도 주변의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고, 뇌 속에서는 블루스의 선율이 울려 퍼졌다. 하지만 음악 재생 프로그램을 끌 생각은 없었다. 내 몸이 부서져가는 소리도, 저자들이 나에게 퍼붓는 욕설도 듣고 싶지 않았다. 언뜻언뜻 보이는 입술 모양으로 전해져 오는 증오로도 충분했다.

오른팔이 부서졌다. 쑤시는 것 같은 날카로운 감각이 전해졌다. 경고 메시지다. 파손 부위와 정도가 주황색 화면에 나타난다. 워낙 큰 손상이라 손상 정보 차단 옵션도 무시한 모양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경고창을 닫았다. 계속된 린치에 주황색 창은 계속 감각을 메웠다. 그 때마다 하나씩 창을 닫았다.

아프지도 않았고, 화나지도 않았으며, 슬프지도 않았다. 단지 감내했다. 나에겐 통각이 없다. 계속 전해져 오는 경고 메시지의 쑤시는 것 같은 감각도 단지 귀찮을 뿐이다. 인간이었던 시절의 통각의 경험은, 이제 흐릿해져서 잘 기억나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다. 지금 느껴지는 것은 그 때와 같은 불쾌감이 아니다. 내가 말없이 이 폭력을 감내하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두 팔과 두 다리가 모두 박살나자, 시위대는 몽둥이찜질을 그만두었다. 덩치 큰 흉악한 인상의 사내가 내 목을 움켜쥐고 질질 끌고 갔다. 기계의 몸에는 머리카락이 나지 않으니까 어쩔 수 없었겠지. 바닥에 박살난 다리가 질질 끌렸다. 내 귀엔 들리지 않았지만, 틀림없이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났을 것이다. 부서진 부분에서는 포도당 수액과 윤활유가 흘러나왔고, 박살난 리니어 모터 같은 부품들이 흩뿌려졌다. 인간에 비하면 그다지 잔인한 장면은 아니었다.

시위대는 나를 기다란 파이프에 묶고, 여럿이서 함께 들고 다녔다. 고지에서 보는 시위대의 모습은 제법 장관이었다. 말하자면, 질서 있는 혼돈이었다. 깃발을 흔들어 사람들을 지휘하고, 파이프를 휘두르며 뭐든 때려 부수고, 화염병의 불빛이 어두운 골목을 비췄다.

불길이 비추는 그 골목 속에 박 아저씨가 있었다. 오른팔의 기계손은 박살이 났고, 내가 치료해주기 전보다 상태가 더 심각해서 피까지 흐르고 있었다. 얼굴도 엉망진창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인간이기에 나처럼 매달아 끌고 다니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박 아저씨의 입이 달싹였다. 들리지도 않았고 선명하게 보이지도 않았지만,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시위대를 향해 수십 가지의 험악한 욕설을 내뱉었다. 하지만 시위대가 자신 때문에 잡히지는 않기를 기도했다. 만일 자신이 폭행 사건의 피해자가 된다면, 시위대가 재판을 받기도 전에 감방에 갇히게 될 테니까. 그리고 오른팔을 다시 잘라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는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고, 따라서 살아갈 수도 없다.

시위대는 행동이 점점 과격해져서, 이제는 판잣집을 통째로 뜯어내기까지 하고 있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내 누추한 집이 뜯겨져 나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내가 살아왔던 흔적들이 밟히고, 불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내 머릿속을 감도는 것은 단지 음악 소리뿐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나의 삶을 부수고 있었다. 남자, 여자, 키 큰 사람, 키 작은 사람, 까무잡잡한 사람, 하얀 사람, 긴 생머리인 사람, 짧은 스포츠머리인 사람……. 그 중에서, 덥수룩한 곱슬머리에 허름한 쑥색 외투를 걸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안구 카메라의 초점이 조정되고, 그가 좀 더 똑똑히 보였다.

틀림없다. 조카다. 저 옷은 내가 이 동네로 도망치다시피 이사했을 때, 짐을 정리하면서 건네준 것이다. 그 때까지도 여전히 취업을 하지 못했던 조카에게 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하면서. 그 때 조카는 고맙다고 말하면서, 행복하라고 해 줬었다. 비록 그 말에 진정한 이해심은 없었으나, 그건 내가 죽은 이후 최초로 들었던 인사였다.

그랬던 그가, 지금 내 집을 박살내고 있다. 내 집을 모를 리는 없다. 그 외투를 전해 줬던 곳이 저 집 앞이었으니까. 그는 지금 진심으로 나를 증오하고 있는 것이다. 일자리의 약탈자로서, 인간을 벗어난 괴물로서.

내가 ‘나’가 된 이후로, 처음으로 박장대소했다. 물론 아래의 시위대가 보기에는, 파이프에 매달려서 있지도 않은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는 흉한 꼴일 뿐이다. 그는 나에게 두 가지를 주었다. 첫 번째 인사, 첫 번째 웃음. 감사 인사를 해야 할까? 내 모습이 어지간히도 보기 흉했는지 누군가가 버둥거리는 나를 파이프로 퍽 하고 때렸다. 시야가 흔들렸다. 충격이 뇌에까지 전달된 모양이다. 하지만 아프지 않다. 나에게는 통각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화가 나지도 않는다.

이제 나는 정신마저도 인간이 아니게 된 것일까. 통각이 없으니까, 인간의 정신이 누려야 할 고통도 없다. 애초에 ‘나’라는 건 대체 뭐였을까. 이 정신? 사고체계? 육체가 바뀌면서, 뇌를 기계에 옮기면서 이미 정신도 수없이 많이 바뀌었을 것이다. 고통을 잊었고, 친구를 잃었고, 인간으로서 맞을 최후조차도 사라졌다. 육체가 죽으면서 감각 역시 상실되어 디지털로 바뀌었다. 같은 정신일 수 없다.

그래, ‘나’는 내가 아니다. 지금까지 수없이 많이 언급했던 ‘나’는 모두 가짜.

나는 이미 죽었고, 이제 곧 죽을 것이다. 죽음은 아플까? 죽음은 슬플까? 인간이라면, 아니 인간이 아니더라도 당연히 아프고 슬플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난 한없이 느긋하다.

아, 딱 하나 인간으로서 남아 있는 부분이 있었다. 박장대소, 행복감. 조카는 나보고 말했다. 행복하라고. 그렇다면 죽는 순간까지도 행복해야 할 것이다.

나는 머릿속에 창을 두 개 띄웠다. 하나의 창은 아날로그 시계. 현재 시간은 11시 4분, 시계를 보지 않고도 시간을 알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편리하다.

하지만, 나에게는 곧 시간이 의미가 없어진다.

또 하나의 창. 일종의 뇌내 마약 프로그램으로, 뇌에 자극을 주어 호르몬의 분비를 유도해 극도의 쾌락을 주는 물건이다. 오직 기계에 뇌가 의존하고 있는 네크로이드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약. 어제 이걸 조금 과하게 썼다가 인사불성이 되었다. 당연하다. 정도를 넘어버린 쾌락은 독이다.

그러니까, 이건 날 확실하게 행복 속에서 죽게 해 줄 것이다.

설정은 안전 모드를 해제해 255, 어제 내가 사용한 것이 15였으니 확실히 날 죽일 수 있을 것이다. 타이머는 5분 후. 타이머가 뇌 속에 철컥철컥 소리를 퍼트린다. 블루스 리듬에 박자를 맞춘다.

주변을 돌아본다. 분노한 군중은 닥치는 대로 때려 부수고 있다. 박살난 집만 수십 채. 청소하는 사람은 괴로울 것이다. 하지만 나와는 관계없는 일. 마지막으로 화염병의 이글거리는 불빛을 눈에 새기고, 두 안구 카메라와의 연결을 끊었다.

시야가 암흑 속에 잠긴다.

차례차례, 감각을 차단해 간다. 온도 센서, 압력 센서, 중력 센서……. 나는 점점 텅 비어간다. 마침내 남은 것은 음악 소리와 마약 프로그램뿐. 음악도 끌까 하다가 관뒀다. 죽을 때 음악 소리가 들리는 것도 나름 즐거울 것 같았기에.

철컥거리는 타이머 소리가 음악 소리와 공명하는 것이 ‘느껴졌다.’

시간은 끊임없이 흘러갔다.

5, 4, 3, 2, 1, 0

아무것도 없는 공허 속에서, 무형의 뭔가가 다가왔다.

내가 받아야 했지만, 몸을 기계로 바꾸면서까지 피해 다녔던 것.

죽음.

=즐거움.


나는, 그 속에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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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제가 써 온 습작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걸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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