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펠라시아 기행록 - 1

[군대간]렌코가없잖아 2 2,463
1.

 경첩에 박힌 못이 모두 빠지자, 시그는 문을 발로 걷어찼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넘어가자, 시그의 검은 눈동자에 이 문까지 가기 위해 지나 왔던 슬라임이 가득한 더러운 하수도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 문틀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시그는 지체 없이 문틀 안으로 보이는 통로에 들어갔다.
“봉인서고? 너무 쉽잖아!“
 시그는 장도리를 벨트에 찔러 넣으면서 혼잣말을 했다. 왕립 마법학교의 잘 나가는 마법사들도 더 큰 자물쇠, 더 길고 튼튼한 빗장을 만드는 것만이 비밀을 숨기는 방법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건진 몰라도 문의 경첩은 신경 쓰지 않는다니. 너무나도 어리석다고 시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우월감에 젖어 있기에도 시간은 모자랐다. 시그는 곧바로 통로 끝에 있는 다른 문을 열기 시작했다. 이번 문은 문 전체에 별 모양의 마법진이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봉인 마법이 걸려 있는 것 같았지만, 그것 또한 시그가 주머니에서 부적 한 장을 꺼내 문에 붙이자 아무 것도 없다는 듯이 사라졌다. 봉인이 풀린 것을 확인한 시그는 다시 한 번 장도리와 송곳을 꺼낸 뒤, 송곳으로 못이 헐거운 부분을 찾아내 띄운 다음 장도리로 못을 하나 하나 빼기 시작했다.
 시그는 못을 빼며 자신의 임무에 대해 생각했다. ‘왕립 마법학교 도서관에서 검은 표지에 검은 종이로 이루어진 책을 한 권 빼 와라.’ 일 주일 전에 수하에게서 마법학교 도서관의 결계가 약화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보스가 친히 시그를 불러 전한 명령이었다. 강력한 저주 마법이 담겨 있어서 해독 마법을 걸지 않는 이상 검은 책장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마도서, ‘흑의 서’를 가지고 싶지만 하수도 어딘가에 도서관으로 통하는 문이 있다는 정보만을 알고 있는 보스는 그 문을 찾는 일을 시그에게 맡겼고, 시그는 보스의 명에 따라 하수도 지도를 구해 마법학교로 가는 루트를 파악해 보았다. 그리고, 일 주일 동안 수도의 모든 시민이 여름 축제를 즐기는 동안 자기 혼자 밤에 몰래 하수도를 뒤지며 허탕을 치기를 반복한 끝에 마침내 길을 찾아낸 시그는 하수도에 가득한 슬라임들을 베어 가며 이 곳에 도착한 것이었다.
 시그는 다시 한 번 문을 발로 찼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먼지가 일었고, 문틀 뒤에는 또 다른 문이 있었다. 시그는 다시 한 번 경첩을 노려 보기로 했다. 만약 이 도서관의 다른 문들도 자물쇠나 빗장에 신경 쓰느라 경첩을 신경쓰지 않았다면, 까만 눈 속에 까만 책을 담고 있는 이 도적의 발길질에 넘어가게 될 것이었다.
시그는 다시 한 번 문틀 안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하지만, 이번엔 뭔가 이상했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뒤통수를 노려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분명 자신밖에 없는데도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시그는 불길한 직감에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 곳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2.

 프리시아는 도서관 한 켠에 있는 푹신한 1인용 소파에 앉아 하품을 했다. 소파 옆에는 각양각색의 책들이 잔뜩 쌓여 있었고, 바닥에는 읽다 만 책들이 펼쳐진 채 잔뜩 널브러져 있었다. 프리시아 주변에 있는 책들만 모아도 작은 도서관을 만들 수 있을 정도의 분량이었다. 하품을 마친 프리시아는 곧바로 팔걸이에 걸려 있는 책을 집어 펼쳤다. 검은 표지에 검은 종이로 된 글씨 하나 써져있지 않는, 시그가 찾고 있는 ‘흑의 서’였다. 하지만 프리시아는 이내 그 책을 휙 하고 소파 뒤로 던져 버린 뒤 한숨을 쉬었다.
‘이런 책 따윈 도서관에 널리고 널렸는데, 어리석군.’
 프리시아는 품을 뒤져 크리스털 결정 하나를 꺼낸 뒤 살짝 던졌다. 크리스털은 그대로 허공에 뜬 채로 초록색 빛을 비추기 시작했다. 어두운 도서관 한 켠에 초록색 불빛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이윽고 프리시아는 흑단으로 장식된 펜 하나를 꺼내 허공에 마법 문자를 휘갈겼다. 펜 끝에서 마법 문자가 살아나 허공에 초록색 글씨가 하나 하나 살아나자, 프리시아가 있는 곳은 에메랄드 빛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이윽고 초록색 문자들은 크리스털을 중심으로 모이기 시작했고, 얼마 안 가 크리스털 끝에서 팟 하는 섬광이 터졌다. 그러자, 크리스털 위에 네모난 화면이 떠올랐다. 화면 속에서는 검은 머리의 도적이 세 번째 문의 경첩을 뜯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프리시아는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모든 것이 프리시아가 머릿 속에 짜 놓은 그대로였다. 일부러 봉인서고의 봉인의 강도를 낮추면 봉인서고 속에 널리고 널린 마도서를 훔치려는 사람이 생길 것이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봉인서고에서 책을 빼내기 위해 설계된 지하통로로 잠입할 것이다. 조금 의외의 사실이 있다면 강력한 봉인이 되어 있는 마법과 자물쇠를 모두 걷었는데도 일부러 문의 경첩만을 노리는 저 도적의 행동이지만, 그건 실은 경첩에도 강력한 마법이 걸려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프리시아에게는 그저 하나의 코미디에 불과했다.
“자, 어서 들어와라, 어리석은 자여. 어서 나와 만나 하룻 밤 산책을 나가자꾸나.”
 프리시아는 언젠가 본 책의 구절을 중얼거렸다. 한 대갓집 아들이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바보인 여자를 꾀어 사랑을 이룬다는 흔해빠진 연애소설에서 나온 말이었다. 물론 차이는 명확했다. 프리시아는 화면에 비친 시그를 이용하려는 것이지, 시그를 사랑해서 봉인서고에 들이는 것이 아니니까. 하지만 프리시아는 꼭 그런 것만은 아닌지 생각을 하다 말고 잠시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이윽고 프리시아가 허공에 손짓을 하자, 화면은 사라졌고, 얼마 안 있어 적막한 도서관 한 켠에서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3.

 시그는 열두 번 째 문을 열었다. 열두 번 째 문은 경첩을 부숴야만 했던 다른 문과는 다르게 빗장이 걸려 있지만 자물쇠가 없었다. 시그는 이번에도 마법학교 도서관의 허술함을 비웃었다. 문 너머에는 커다란 책장들이 잔뜩 쌓여 있었고, 문이 열리자마자 묵은 종이에서 나는 향기라고 표현해야 할지 냄새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를 알 수 없는 것이 후각을 자극했다. 시그는 자신이 봉인서고에 찾아온 것을 알고, 발소리를 죽이며 일단 눈 앞에 있는 책장으로 다가갔다. 그 때,
“왔는가, 어리석은 자여.”
 느닷없는 목소리에 시그는 화들짝 놀라 벨트에 꽂아 둔 단검을 빼 들고 목소리가 들린 쪽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 곳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누구냐!”
“초면에 칼부터 빼들면 자기 소개가 잘도 나오겠군.”
 시그는 다른 쪽에서 들린 목소리를 향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아주 잠시 동안 어둠 속에서 희미한 그림자가 시그의 눈에 비쳤다. 시그는 망설임 없이 그 그림자에 단검을 던졌다. 하지만 단검은 그저 책장에 푹 하고 꽃힐 뿐이었다.
“...무례하구나.”
 시그가 사라진 그림자를 쫓는 사이, 목소리는 시그의 등 뒤로 옮겨갔다. 시그는 급히 뒤를 돌아봤지만, 그 곳에는 에메랄드빛 마법 문자가 가득 차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시그가 어찌할 틈도 없이, 마법 문자들은 시그의 몸을 감싸더니 초록색 줄이 되어 시그의 손발을 묶었다. 시그는 온 힘을 다해 초록색 줄에서 빠져나오려 했지만, 줄은 이미 시그의 사지에 꽉 매여 있었다.
“윽... 마녀 주제에...”
 시그는 분하다는 듯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림자에게 악담을 퍼부었다.
“마녀라니, 여전히 무례하구나.”
 시그의 눈에 악담에도 말투 하나 바뀌지 않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봉인서고의 어둠 속에서 나온 것은 작은 체구의 소녀였다. 뾰족한 귀, 입고 있는 흰색 원피스처럼 새하얀 살결, 다리 아래까지 내려와 옆으로 넓게 뻗은 물빛 머리카락, 그리고 무심하게 시그를 바라보는 깊은 호수 같은 푸른 눈동자를 한 소녀의 모습이 시그의 검은 눈에 가득 찼다.
“마녀가 아니고... 요정?”
“반은 맞췄다고 해 두지. 프리시아 라피즈. 그냥 프리시아라고 불러도 괜찮다.”
 시그의 질문에 프리시아는 무심히 대답했다. 프리시아는 손에 든 검은 책을 시그에게 내밀었다.
“아마 이것 때문에 이 밤중에 날 찾아왔겠지. 안 그런가?”
 시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묵비권을 써도 상관없다. 어차피 그대가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건 전부 나의 계획에서 비롯된 것이니까.”
 프리시아는 말을 마치고 다른 쪽 손에 든 펜으로 마법 문자를 허공에 휘갈겼다. 펜 끝에서 나온 문자들은 시그를 묶어 둔 초록색 줄에 붙더니, 팟 하는 소리와 함께 시그의 손발이 풀려났다. 시그는 손발이 풀리자마자 곧바로 도망갈 준비를 하려고 프리시아에게서 등을 돌렸지만, 그 순간 시그가 열고 들어온 문이 쾅 하고 닫혔다. 시그는 놀라서 다시 한 번 프리시아를 돌아보았다.
“그대에겐 묵비권은 있지만 선택권은 없다는 사실, 잘 알아두도록.”
 시그는 프리시아에게 무언가 얘기하려 했지만, 프리시아는 그런 건 상관없다는 듯 자기가 할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어리석은 자여, 아마 그대는 일 주일 전에 봉인서고의 결계가 약해졌다는 제보를 받고 여기로 왔을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이 봉인서고에 엄청난 마도서들이 가득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보통 알고 있는 건 ‘흑의 서’ 밖에 없을 테니, 당연히 그걸 구하려고 여기에 왔겠지.”
“그래서, 그게 왜?”
“봉인서고의 결계를 약화시킨 게 바로 나다.”
 프리시아의 말에 시그는 깜짝 놀랐다.
“별 건 없고, 봉인서고 안에서 밖으로 나갈 수 있는 통로를 개척할 사람이 필요했다. 그래서 이 봉인서고에 흔해빠진 마도서 하나를 미끼로 지하 통로에 있는 문들을 모두 열어 줄 사람을 하나 불러낸 거지. 그래서 오게 된 게 그대다. 도적이라고 해서 험상궂은 악한이 올 줄 알았는데, 의외로 젊은 친구였다는 거에는 조금 놀라긴 했지만 말이다.”
 프리시아는 말을 마치고 곧바로 방금 자신이 보던 수정 화면을 허공에 비춰 보였다. 화면에는 시그가 열심히 경첩의 못을 빼는 모습이 보였다. 시그는 완전히 할 말을 잃고 멍하니 화면만을 보다가, 이윽고 자신이 프리시아에게 장난감처럼 이용만 당했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이 꼬맹이가 날 가지고 놀았어!”
“...미안하다, 어리석은 자여.”
“미안하다면 다야? 그리고 자꾸 어리석은 자니 뭐니 하는데 내 이름은 시그야, 시그!”
 시그는 곧바로 프리시아에게 덤벼들었지만, 프리시아는 곧바로 시그를 피해 달아나기 시작했다. 시그는 곧바로 프리시아를 쫓아갔다.
“이 꼬맹이, 잡히기만 해 봐!”
 봉인서고 한 켠에 시그의 외침 소리가 울려퍼졌다.

4.

“그대는 여전히 어리석군. 내가 도망갈 때 아예 가만히 있었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것을.”
프리시아는 먼 발치에서 가쁘게 숨을 고르는 시그를 가만히 바라보며 말했다.
“진짜 이런 게 어딨어!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시그는 방금 자신이 열고 들어온 문의 빗장을 뽑으려고 애써 봤지만,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잘 열리던 빗장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죄야 뭐 충분하지 않나. 무단침입죄에 절도죄. 물론 이럴 때는 내가 함정수사를 하긴 했으니 나에게도 책임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시그는 기운이 빠져 털썩 주저앉았다. 하지만 시그의 눈만은 지치지 않고 프리시아를 노려보고 있었다. 때릴 수도 없고, 쫓아갈 수도 없어서 속만 부글부글 끓고 있었기 때문에 시그의 눈에도 무언가가 부글부글 끓는 것 같았다.
“하아,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겠나.”
 프리시아는 그런 시그를 보며 한숨을 살짝 쉰 뒤, 시그가 뚫고 온 문 반대편에 있는 또 다른 문을 가리켰다.
“저 문이 뭐? 또 저거 따면 날 속이고 놀려먹을 거냐?”
“그럴 리가 있나.”
 프리시아는 곧바로 문으로 다가가 경첩을 열고, 문을 열었다. 문 너머에는 계단이 있었다.
“이 계단을 오르면 도서관 바깥으로 갈 수 있다. 다만 나는 도서관 바깥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내가 이 밤중에 그대를 부른 이유는 단 하나, 바깥 안내를 할 사람이 필요해서였다.”
“뭐?”
 시그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자세한 사정은 조금 있다가 얘기하도록 하지. 일단 나를 따라와 주겠나.”
“싫은데?”
 프리시아는 시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펜을 들어 마법 문자를 허공에 그렸다. 시그는 그 광경을 보자마자 언제 지쳤냐는 듯이 프리시아의 앞에 다가와 프리시아의 팔을 잡았다.
“아, 알았어.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냥 가 줄게.”
“진작에 이랬으면 얼마나 좋았는가.”
 프리시아는 말을 마치고 계단을 하나씩 오르기 시작했다. 시그도 일단은 프리시아를 따라가기로 했다. 계단을 조금씩 오르며 두 사람은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잠시 그대에게 질문 하나 할 수 있는가?”
“어, 뭔데?”
“그대가 봉인서고에서 가져가려고 했던 ‘흑의 서’가 어떤 책인지 알고 있는가?”
“그냥 엄청나게 강력한 마도서라는 거밖에...”
“역시 모르는군. 그 책은 강력한 저주 마법을 담은 책이다. 나 또한 그 저주의 피해자지.”
 프리시아는 말을 하고 나서 시그를 돌아보았다. 시그는 프리시아의 잔잔한 호수 같은 눈동자가 파문이 이는 것처럼 격정적으로 변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피해자?”
“내가 어렸을 때, 내 어머니가 그 마도서에 있는 저주에 걸렸다고 들었다. 어머니는 죽어가면서도 마법도서관의 결계 안에서는 나를 살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죽을 힘을 향해 도서관에 들렀고, 그 당시에 사서를 하고 있었던 도서관장, 즉 내 아버지에게 나를 맡겼다고 한다. 하지만 아버지도 내 저주를 풀진 못했고, 결국 난 태어나고 나서 이 도서관을 떠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프리시아는 ‘단 한 번도 없다’ 라는 말을 강조해서 말했다.
“만약 네가 저주를 풀지 않고 도서관 밖으로 나가면 어떻게 되는데?”
“내 어머니가 그랬듯, 한 줌 먼지로 화하겠지.”
“그런데, 넌 지금 여기서 나가려고 하고 있잖아?”
 시그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프리시아는 별 문제 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지금 난, 내 목숨을 건 도박을 하고 있다.”
“도박?”
“얼마 전, 밖에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확신이 섰다. 도서관에 새로 들어오는 책들을 하나 하나 파악해 본 결과, 지금 이 왕국 전체에 도서관에 있는 결계와 비슷한 류의 결계가 생겨나고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 원인이 무엇이든간에 밖에 나갈 수 있게 됐다는 거지. 하지만 나도 내 판단에 확신이 서지 않아서, 내 목숨을 걸고 확인해 보려고 한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하고 있다고 말하긴 했지만, 그런 것 치고는 프리시아의 눈빛은 얘기하는 내내 별빛이 반짝이듯 반짝였다. 말 또한 특유의 무심한 화법으로 이어 가고 있긴 했지만, 평소와는 다른 격양된 느낌이었다.
“그럼 왜 혼자 안 가고 번거롭게 나까지 엮이게 만든 거야?”
“우선 나는 도서관 바깥 지리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다. 길잡이가 필요하다. 그리고 만약 내가 오판을 해서 도서관 밖에서 죽게 되면 그걸 알릴 사람도 필요하지. 만약 내가 죽게 되면 도서관 프런트에 있는...”
“거기까지 해 둬. 세상에, 그런 거까지 생각해 뒀어?”
 시그는 자신이 죽은 뒤에 있을 수 있는 얘기까지 무덤덤하게 말하는 프리시아를 말렸다.
“...아무튼 시그, 그대가 가져가려는 책은 나처럼 기구한 운명으로 태어날, 혹은 그 전에 죽어 버릴 사람을 또 만들 수 있는 책이라는 것을 명심하길 바란다.”
 시그에게 보스의 명령은 절대로 거역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시그는 프리시아의 말을 듣고 나서도 흑의 서를 훔쳐갈 생각을 버리질 못했다. 하지만 시그도 이런 말을 했던 프리시아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은 왠지 신경이 쓰였다. 그래서 시그는 보스의 명령을 거절할 수 없다고 솔직하게 말할지, 아니면 프리시아를 달래기 위해 책을 훔치기 않겠다고 얘기할지 고민했다. 잠시간의 고민 끝에, 시그는 결론을 내렸다.
“알았어. 그런 위험한 책 따윈 손에 대지도 않을게.”
“잘 생각했다.”
 그 사이, 두 사람의 눈 앞에서 계단이 끝났다. 계단 끝에는 자그마한 나무 문이 하나 있었다.
“다 왔네.”
 시그는 가볍게 한 마디를 내뱉었고, 그 사이 프리시아는 크게 심호흡을 한 뒤 조심스럽게 문 손잡이를 돌린 뒤 문을 열었다. 시그는 가만히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프리시아가 진짜 한 줌의 재로 변해버리지 않을까 하는 조마조마한 마음에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문이 열리자, 문 밖에는 왕국의 수도, 아스폴리스 거리의 집들에서 새어나온 불빛이 밤을 환하게 수놓고 있었고, 저 너머에서는 여름 축제가 펼쳐지는 광장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 왔다. 프리시아는 처음 보는 풍경에 잠시 넋을 잃었다가, 무언가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인 뒤 눈을 꼭 감고 조심스럽게 문 밖으로 발을 내딛었다. 통굽 샌들의 코르크 굽이 포장도로의 바닥에 하나, 둘, 가볍게 내려앉았다. 그 뒤, 프리시아는 조심스럽게 두 눈을 떴다.
 프리시아의 두 다리는 도서관 밖을 내딛고 있었다. 물론 재가 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프리시아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주변을 급히 돌아보더니, 다시 한 번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아... 다행히 죽진 않았군. 그러면!”
 프리시아는 곧바로 밤거리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문 뒤편에서 프리시아와 함께 한도의 한숨을 쉬고 있던 시그는 갑작스러운 프리시아의 행동에 화들짝 놀랐다.
“야 꼬맹이, 너 갑자기 뭐 하는 거야!”
“보면 모르겠나? 생애 첫 밤 산책을 즐기고 있다!”
 시그는 길다란 물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거리로 달려가는 프리시아의 뒤를 쫓았다. 프리시아는 그러거나 말거나 빙그르르 돌아도 보고, 두 팔을 하늘 위로 쭉 뻗어도 보며 흥겨운 축제 음악 소리가 흘러나오는 곳으로 몸을 맡겼다. 마치 얼어붙은 것만 같았던 프리시아의 얼굴에는 행복한 미소가 떠나지 않았고, 프리시아의 두 눈은 호기심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시그는 프리시아를 쫓는 것을 멈추고 잠시 프리시아를 바라보았다. 프리시아는 마치 한 밤 중에 커다란 달이 뜬 호수 위에서 춤을 추는 요정 같았다.

Episode 1. '밤 산책‘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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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찾아뵙는군요. 렌없입니다.

처음엔 예전에 여기 올렸던 리졸버나 다시 써서 올릴까 했는데(어차피 리졸버는 리부트가 필요했고) '굳이 현실적인(?)이야기에 가상의 세계관을 써도 될까?' 라는 회의가 들어 생각한 끝에 '배경을 1960년대 미국으로 바꾸고, 내가 이에 대한 공부가 다 되었을 때 시대에 맞게 설정을 바꿔서 다시 써 보자' 라는 결론을 내리고 일단 보류했고,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하나 생각해 뒀는데 '이거 내가 생각해도 플라네타리안이랑 너무 비슷한 설정인데?' 라는 생각에 또 보류했습니다.

그렇게 소재가 떨어져서 미쳐가고 있던 사이, 3년 전 ORPG에서 써먹었던 '프리시아' 라는 캐릭터가 생각나서 그 캐릭터를 가지고 이야기를 써 보기로 했습니다. 캐릭터도 이미 머릿 속으로 굴려 봤던 녀석이니 편하고, 장르도 그냥 판타지니 세계관 짜는 데도 별 문제 없겠지! 하는 생각에 이렇게 쓰긴 했는데, 쓰고 보니 별 특징 없는 바닐라 아이스크림 같은 작품이 된 것 같은 느낌도 드네요.

아무튼, 잘 봐주셔서 감사하고, 냉정한 평가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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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백하고도 달콤한 즐거운 글입니다.
그 느낌, 잘 이어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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