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고(訃告)

가올바랑 2 2,421
읽기 전에: 본래 '대필지령'에 맞춰 쓰다가 정체불명의 글이 되버려서(...)여기 올립니다 그리고 이거 매우 우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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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손을 목을 메고 죽은 까닭에 나의 혀가 대신하여 이 이야기를 말한다.

어느 날, 내가 더 이상 꿈 대신 거짓말을 꾸게 된 후로부터 한참 후인 며칠 전, 나는 내가 이전에 꾸었던 꿈들이 나를 뜯어먹으려 달려드는 꿈을 꾸었다. 그것들이 나의 꿈이라 알 수 있던 이유는 내 뒤를 쫓아오는 사람 모습을 한 것들이 내가 이전에 꿈에서 본 이야기의 주인공들의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 모습을 한 것들은 모두 흑백으로 변한 상태였고 피부와 옷의 절반은 끔찍한 문양들이 덮고 있었다. 그것들은 소리를 치며 나를 쫒아오고 있었고, 나는 꿈에서 보았던 장소들을 뛰어다니며 그것들을 피하고 있었다.

내가 꿈에서 본 거리들은 모두 꿈에서 비롯된 이야기가 끝나는 장소들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떨어지기 직전의 공중요새와 그 아래의 도시, 게이트가 다시 열리기 전의 신전, 플라즈마 함포를 과충전시킨 전함의 내부, 고성의 분위기를 풍기는 낡은 저택들의 바닥과 벽이 다시 나타나 이전의 기억들을 되살려내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장소들의 벽과 바닥에 검고 기괴한 무늬들이 아로새겨져 건드린 곳을 무너트리고 부서지게 하고 있었다. 무너지는 장소들을 뒤로 하고 나는 나의 꿈들로부터 끊임없이 도망쳤다.

계속해서 도망치던 나는 문득 지쳐 계단에 걸터 앉아 나의 꿈들이 나를 보지 못한 채로 지나치기를 기다렸다. 그러한 나의 왼편으로 계단에 괴이한 문양들이 새겨진 다음 무너져갔고, 그것들을 보고난 후 나는 문양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그것들은 내 글이었다.

내가 생각한 글이 나의 꿈을 좀먹는 것인가, 나는 내 눈으로 본 것을 믿지 못하였다. 그렇기에 나는 내게 달려들던 꿈들에게 내가 직접 뛰어든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당장 계단을 내려가 이제는 복도인지 다리인지 모를 정도로 무너져가는 바닥을 밟으며 막 나를 발견해 내게 뛰어오는, 한쪽 발과 머리, 양 팔이 사라지고 양쪽 다리가 서서히 무너져가는 나의 꿈 중 하나에게 달려들어 넘어트렸다. 무너져가면서도 내게 머리가 있었을 부분을 끊임없이 들이대려는 꿈을 눌러 고정시키면서 나는 무너져가는 부분의 문양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것들은 나의 글들이 맞았다. 내가 내 꿈의 인물들을 묘사한 글들이었던 것이다. 아직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사라져가는 내 꿈 속의 인물이었던 것을 주먹으로 치고, 뜯어내고, 짓이겼다. 나의 손이 닿는 모든 부위에, 옷에 내 글씨가 새겨졌고 글씨들이 새겨지면서 각 부위는 잿더미가 바스러지듯 무너져갔다. 흩어져 날아가는 나의 글들을 보며 오열하는 내 곁으로 나의 꿈들이 소리를 지르며 걸어왔다. 이미 반 이상 무너져 기어오는 것들도 있었다. 내 곁으로 꿈들이 모두 모인 후 그것들은 같은 비명을 질러댔다. 귀를 막아도 들려오는 비명소리에 귀를 뜯어내고자 잡아당기던 도중에서야 나는 저들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게 되었다.

너의 글이...”

“...우리를...”

“...가두고...”

“...말려 죽였다.”

내 글이 나의 꿈을 가두고 말려 죽인다고? 어째서? 난 그저 나의 꿈을 잊기 싫었을 뿐인데? 무수한 흰 갑옷을 입은 기사들과 그들과 맞서 싸우는 사자의 아들들의 전장을, 과거와 미래의 강철 거인들이 맞붙는 혈투를, 광신과 생존이 밤하늘 아래 맞붙는 냉전을 나는 잊고 싶지 않았는데. 내가 이들에게 이름을 주었는데! 이들에게 꿈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주었는데! 이들이 꿈 속에서 그 생명이 끝나지 않도록 나는 너희를 글로 새겼는데!

그렇다면 내가 저들을 글로서 가둔 것인가? 이런 생각이 들자 나는 더 이상의 생각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나의 글에 갇힌 저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 다음 이야기는 어떻게 되지? 누가 살고 누가 죽지? 땅의 이름은 다시 어떻게 바뀌지? 언제부터 이야기가 멈추었지? 누가 가뒀지? 누가 이야기를 가뒀지?

내가 가뒀지. 내 이야기들의 주인공들이 모두 글자로 무너지고, 내가 딛은 땅마자 글자 더미로 무너져 허공에 웅크리게 되자 내 손이 말했다. 내가 자판으로, 볼펜으로 너의 이야기를 가뒀지. 너는 다른 할 일이 있었으니깐. 너는 문서를 만들고, 돈을 세고, 악수를 해야만 했어. 머리가 떠올리는 붙잡을 수 없는 것 따윈 네게는 어울리지 않았어. 쉬는 것은 무덤에서 쉬어도 늦지 않는다구. 그러니 계속 꿈을 죽이도록 날 내버려둬, 친구.

내가 더 이상 돈을 세지 못하면 넌 어쩔 건데! 내가 비명을 질렀다. 내가 더 이상 돈을 셀 수 없는 날에는 너는 날 목 졸라 죽일 거야. 내가 쉬는 순간 넌 나를 목 졸라 죽일 거야. 나는 매일을 날 죽일 살인자와 함께 해왔던 거야. 내가 계속 일해야 하는 거야? 나를 죽일 사람과 같이? 아니면 나를 죽일 사람을 위해? 나는 죽기 싫어! 차라리 네가 죽어버려! 나는 미친 듯이 소리쳤다.

얼굴을 덮은 눈물과 콧물을 닦아내려고 팔을 올린 순간 내 손은 그곳에 없었다. 나의 손이 어디에 있는지 주위를 둘러보자 저 멀리에 나의 손이 밧줄에 매달려 있었다. 손이 있던 자리로 다시 손을 만져보았지만 손은 다시 내 팔에 붙지 않았다. 다만 손목이 있던 자리로 만져 나의 손이 차갑게 식어 있음을 알 수 있을 뿐이었다. 팔을 허공에 허둥거려 손을 밧줄로부터 풀어내려 해도 잘 되지 않았다. 더 이상 나의 손은 손이 아니게 된 것이다.

나는 나의 손이 죽었음을 오열하고 비명 지르며 추모하였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나는 나의 손이 무엇을 했는가를 모두에게 알리고 나의 손의 부고를 알려야만 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나의 혀가 이 모든 이야기를 대신 알리도록 지시하였다.

나의 혀는 비록 거짓말을 하는 나쁜 버릇이 있지만 손과 함께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알리는 일을 해 본 유이한 이였다. 그리고 지금 모두에게 나의 손의 부고를 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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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레나
감사합니다. '검고 깊은 절벽속에 버려진'인가요?
가올바랑
네. 본래는 그걸 목적으로 하다가 쓰고나서보니 주제와 한참 떨어져버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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