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잃은 바이킹 - 2

작가의집 1 2,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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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얀센은 원주민 아낙이 내민 나무술잔에 입을 대려다 말고 산맥쪽에서 울리는 뿔피리 소리에 행동을 멈췄다. 야영지에 모인 바이킹들과 음식을 나눠주려 내려온 오트리치 아낙, 청년들도 소리가 나는 산맥을 바라봤다. 산맥쪽만 우두커니 앉아 보고있는 얀센앞에 있던 아낙이 물어왔다.

"무슨 일인가요?"

얀센은 고개를 돌려 아낙을 보며 활짝 웃었다. 그리고 옆에 둔 작살을 집어들어 아낙의 얼굴에 그대로 쳐박아 버렸다.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진 아낙이 작살이 꼽힌 채 몇 걸음 비틀대다가 뒤로 고꾸라졌다. 얀센은 쓰러진 시체의 가슴팍에 발을 딛고 얼굴에 박힌 작살을 뽑아냈다. 깨진 얼굴에서 피와 뇌수를 뿜는 시체가 간헐적으로 움찔움찔거렸다.

오트리치 아낙들과 청년들은 너무나 무덤덤하게 일어난 끔찍한 상황에 일제히 비명지르며 마을쪽으로 도망갔다. 얀센은 뽑은 작살을 힘껏 던져 도망치고 있던 어린 오트리치 한 명의 등판에 꽂아버리더니 옆에 다가선 부하 전사에게 귀찮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들 전부 이끌고 따라가서 다 죽여버려라. 아, 아니아니. 다 죽이진 말고 잘 뛰는 년놈 몇몇은 남겨놔. 그것들을 따라가야 어디들 사시는지 알 수 있으니까."

전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칼을 뽑으며 크게 괴성을 질렀다. 그것을 신호로 야영지의 흰 늑대 부족민들이 삼삼오오 무기를 꺼내들며 밖으로 야영지 밖으로 쇄도했다. 얀센은 세갈래 작살에 꽃혀 덜렁거리는 어린아이의 시체를 툭툭 털어 빼더니 코를 후비며 달려가는 부족민들을 따라 천천히 걸어갔다.

"우리 하는 일 마무리가 항상 이렇지 뭐."

얀센은 입이 찢어져라 하품했다. 그 옆에선 어린 바이킹 사내아이가 오트리치 아낙을 덮쳐 쓰러뜨리곤 목덜미에 단검을 여러차례 쑤셔박아대고 있었다. 아낙의 비명이 목덜미 밖으로 피와함께 새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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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 바다의 빛은 초대형 천막 안팎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상황에 충격을 받아 입을 쩍 벌렸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오트리치 전사들은 제대로 이유도 모른 채 자신들을 죽이려 드는 이방인들을 상대하며 악전고투하고 있었지만 위궤양의 고통에서 차츰차츰 회복된 바이킹 전사들이 합세하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있었다. 바이킹들은 처음엔 오트리치들이 음식에 독을 탔었을거니 하며 싸움을 시작했었지만 정작 위궤양때문에 죽은 사람은 없다는 사실은 신경쓰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피에 굶주린 바이킹들일 뿐이었다.

동쪽 바다의 빛은 천막 밖에서 큼지막한 천막 지주대를 휘두르며 달려드는 바이킹들을 상대하는 거구의 사내를 발견했다. 바로 그녀의 삼촌인 까마귀의 눈이었다. 동쪽 바다의 빛은 들고있던 활의 시위를 당겨 삼촌 주의의 바이킹들에게 화살을 한발씩 꽂아버려 쓰러뜨리곤 삼촌에게로 달려갔다. 그러나 까마귀의 눈은 달려오는 조카를 보고는 손을 뻗으며 소리쳤다.

"오지 말거라! 넌 가서 붉은 수수밭과 대전사님에게 이 사태를 알려! 그리고 마을에도 알려야 한다, 이방인들이 우릴 죽이려 한다고!"
"삼촌, 하..하지만..."
"내 걱정은 하지 말거라! 지금은 그게 더 급해!"

동쪽 바다의 빛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입술을 질근 깨물고 뒤돌아서서 왔던길로 다시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래, 더 빨리 뛰거라!"

까마귀의 눈은 동쪽 바다의 빛을 보내고 천막으로 다시 눈을 돌렸다. 그 때, 천막 입구가 거칠게 찢어지며 자신만한 덩치의 이방인 한명이 한 손엔 방패, 한 손엔 살벌한 양날도끼를 들고 나서고 있었다. 아까 까마귀의 눈과 팔씨름 승부를 하던 양날도끼 올라프였다. 올라프는 입가에 흐르는 피를 팔뚝으로 쓱 훔쳐닦고 까마귀의 눈을 노려보며 양날도끼의 몸체로 방패를 거세게 쾅쾅쾅 두드렸다. 유협적인 전투함성은 덤이었다. 까마귀의 눈은 천막 기둥을 고쳐잡고 올라프가 그러하듯 자신도 올라프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래, 그래, 이방인놈. 이번엔 승부를 낼 수 있겠지."

말을 끝마치자, 두 사람은 각자 함성을 내지르며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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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 바다의 빛은 숨을 헐떡거리며 붉은 수수밭에게 돌아와 자초지종을 아는대로 말했다. 붉은 수수밭은 이를 으드득 갈았다.

"알았어, 짝눈아. 넌 일단 마을로 가서 알려."
"...알겠어."

동쪽 바다의 빛은 힘겹게 대답했다. 친구와 같이 싸우고픈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삼촌이 일러줬듯 마을에 위험을 알릴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는 것을 스스로가 제일 잘 알았기에 순순히 그 말에 따르기로 한 것이었다. 동쪽 바다의 빛은 마을로 향하려다가 다시 돌아서서 붉은 수수밭을 갑자기 꼭 끌어안았다.

"으익!"
"수수밭. 다치면 안돼? 알았지?"
"야, 야! 징그럽거든! 저리 안 가?!"

붉은 수수밭은 부드러운 흰 깃털이 자라고 있는 친구의 머리통을 탁탁 두들기며 밀어냈다. 밀려난 동쪽 바다의 빛의 눈에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붉은 수수밭은 동쪽 바다의 빛의 머리를 세게 쥐어박으며 말했다.

"으이구. 너 그렇게 맘 약해서 어디 나중에 밥 빌어먹고 살 수는 있겠니? 엉? 우리가 이방인들하고 한 두번 싸워봐? 걱정말고 마을로 어여 뛰어가! 대전사님과 함께 싸우면 여긴 ㅣ문제 없으니까!"

동쪽 바다의 빛은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는 뒤돌아 뛰어갔다. 

"에휴, 대전사님. 쟤를 어쩌면 좋아요?"

붉은 수수밭은 전투망치를 빙빙돌렸다.

"왠지 이번엔 예감히 과히 좋지많은 않지만... 뭐, 별 일 없겠지. 그냥... 다치지만 말자."

동쪽 바다의 빛의 당부를 떠올린 붉은 수수밭의 입에 쓴 웃음이 배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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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라프가 상대의 빈틈을 향해 방패를 휘둘러 찍어버리자, 거구의 사나이는 기둥을 놓치고 까마득한 절벽 바깥으로 떨어졌다. 비명을 지르며 골짜기 사이로 떨어지는 오트리치 전사를 보며 올라프는 승리의 함성을 왁 질렀다. 올라프의 승리와 동시에 연회가 열렸던 천막 안에서 살아남은 바이킹 전사들이 속속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3백명이 들어가서 150정도만 남았다. 아무리 술판 싸움에 능한 그들이었지만 위궤양의 격통덕에 많은 희생이 생긴것이었다. 그나마 위안이라 할 것이라면 동일한 머릿수로 동석했던 오트리치 전사들은 방금 전멸했다는 사실이었다. 흰 늑대 벨니크는 아들 로바즈의 부축을 받으며 천막에서 나와 주위를 둘러보더니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리고 이내 눈을 뜬 벨니크는 한 쪽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토르께서 우릴 저곳으로 이끌고 계시다."

그 방향은 붉은 수수밭이 지키고 있는 대전사의 거처 방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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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사여, 대전사여. 뵙기를 청합니다."

붉은 수수밭이 천막 앞에서 무릎 꿇었다.

"대전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들어오라, 대전사의 수호자여."

늙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붉은 수수밭이 들어서기 무섭게 오색 깃털을 두른 사람이 말했다.

"대전사께서 말씀하시기를, 전에 본 적 없는 거센 폭풍우가 밀려오니 부족을 지키라."

늙은 여자가 뒤이었다.

"대전사께서 말씀하시기를, 속히 무릎을 꿇으라."

붉은 수수밭은 그 말대로 했다. 천막안의 늙은 여자, 노란 깃털의 소년, 공작새 젊은이는 피우던 연초를 한모금 더 빨아들이고는 기묘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아니, 주문이라기 보다는 야생동물의 울음소리가 뒤섞인 노랫소리에 가까웠다. 천막안의 연기들이 노랫소리에 맞춰 움찔거리고 흔들렸다. 이어 노래가 막바지에 이르자 연기들이 형체를 갖추고 일제히 움직여 붉은 수수밭의 콧속으로 빨려들어갔다. 붉은 수수밭은 눈동자가 들려 흰자위만 보이게 되었고,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연기는 계속해서 흘러들어갔고, 붉은 수수밭의 몸은 몸이 떨리다 못해 움질움질 꿈틀거리듯 움직이더니 등의 날갯죽지에서 무언가 터져나왔다. 살이 찢어지고 피가 튀었지만 붉은 수수밭은 아무런 소리나 내색 않고 꿇어앉아 있을 뿐이었다.

의식이 끝나고 노란머리의 소년은 지친 음색으로 아직 꿇어앉아있는 여전사에게 물었다.

"대전사님? 대전사님? 괜찮으십니까?"

붉은 수수밭은 등에 뻩쳐나온 거대하고 붉은 날개를 한번 펄럭거리더니 대답했다.

"호의를 폭력으로 되값는 이방인들은 살려둬선 안된다."

붉은 수수밭의 몸을 빌린 대전사는 붉어진 눈동자를 번뜩이며 말하고는 전투망치를 들고 천막 밖을 향했다. 동시에 천막안의 세 사람은 기력을 다 하고 쓰러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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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니크와 로바즈를 선두로 한 백 오십여명의 바이킹 무리들이 대전사의 거처를 향해 쇄도하던 중, 맑던 하늘이 별안간 먹구름지며 흐려졌다. 벨니크는 우르릉대며 천둥소리를 내는 먹구름을 보며 외쳤다. 

" 바로 앞이다! 저곳으로 토르께서 인도하신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벨니크 옆에서 같이 달리던 바이킹 전사 하나가 앞에서 날아온 묵직한 뭔가에 맞고 말 그대로 산산조각났다. 그 살풍경한 광경으로 보고 무리가 식겁하며 멈추자, 앞에 보이는 야트막한 등성이에서 날개달린 사람의 실루엣이 드러났다. 붉고 큰 날개를 펄럭이며 점점 다가서는 탄탄한 몸매의 여성, 대전사가 빙의한 붉은 수수밭이었다. 대전사는 방금 바이킹 전사 한명을 박살냈던 전투망치를 한손으로 윙윙 돌리며 적들을 매섭게 노려봤다. 직감적으로 '심각하게 강한 상대'를 앞에 두고 있단걸 느끼고 있는 바이킹들은 쉬이 나서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다 비켜! 비키라고, 이 겁쟁이들아!"

그 때, 양날도끼를 든 올라프가 무리를 헤치고 앞서 달려들었다. 대전사는 망치를 들고 힘껏 올라프를 향해 던졌다. 붕붕 돌면서 날아가던 전투망치는 올라프의 방패를 가볍게 박살내고 올라프또한 산산조각 낸 뒤 주인에게로 다시 활공해 돌아갔다. 그 광경을 제대로, 똑똑히 지켜본 벨니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것이 명확해졌다."
"예?"

로바즈가 의아해했다.

"토르께서 우릴 왜 여기로 인도하셨는지, 그리고 우리가 왜 저 자 앞에 서있는지. 모든것이 명확해졌다, 아들아."

벨니크는 의식용 뿔투구를 고쳐쓴 뒤 칼을 빼들며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위대하신 토르님의 종복 흰 늑대 부족은 들어라! 이 싸움에서 죽는 이는 발키리에게 들려올라가 발할라에서 영원히 영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싸울 영광을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뽑은 칼을 대전사를 향해 겨눴다.

"토르님의 묠니르를 되찾아라!"

일순 바이킹 무리들의 눈이 희번득하게 커졌다. 그들에게 토르의 무기와 자신의 무기를 맞부딛힐 영광이 주어졌고, 토르의 무기에 죽을 수 있는 영광이 주어진 것이었다. 물론 대전사가 들고있는 망치는 그저 염력 주술이 걸린 전투망치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먼 길을 거쳐온 바이킹들의 눈에 그 망치가 묠니르로 비춰보이기엔 충분했다. 백 오십의 전사들은 벨니크의 명령에 따라 목청이 터져나가라 소리지르며 대전사에게 달려들었다. 대전사는 망치를 고쳐잡으며 말했다.

"오늘, 대전사의 전공에 위대한 승리 하나가 더 오를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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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돼, 안돼, 안돼, 안돼..."

동쪽 바다의 빛은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흐느끼기 시작했다. 자신을 믿고 있던 삼촌과 붉은 수수밭에게 너무나 죄스러운 감정이 솟구쳤다.

"그만 둬! 제발!"

동쪽 바다의 빛 이 무력하게 소리쳤다.

야영지에서 바이킹들을 피해 도망간 한 오트리치 청년은 너무 생각없이 달린 나머지 마을로 가는 지름길을 이방인들에게 고스란히 알려주고 말았다. 그 때문에 얀센이 이끄는 천명이 훌쩍 넘는 바이킹들은 오트리치들의 마을에 동쪽 바다의 빛보다 일찍 도착할 수 있었다.

그렇게 마을 앞까지 도착한 바이킹들을 오트리치 전사들이 버티고 서있는 나무방책이 막아서고 있었지만, 산 밑에서 온 이방인들을 그들 역사상 한 번도 한으로 들인 적 없는것으로 유명한 오트리치들의 튼튼한 나무방책은 고도의 석공술로 쌓아올린 대도시의 성벽을 족히 수백번은 박살내 본 바이킹들에겐 그저 애들이 쌓은 모래성이나 다름없었다. 역청을 가득채운 항아리를 방책 밑에 두고 불화살 몇 발 쏘니 굉음과 함께 방책이 박살나고 불타 으스러졌기 대문이었다. 부서진 방책 사이로 바이킹들이 들어가자, 그 이후에 벌어진 상황은 불 보듯 뻔했다.

파괴, 학살, 약탈, 방화, 강간- 약탈자들이 벌일 수 있는 행동 모두가 오트리치들의 유일한 삶의 터전에서 자행되고 있었다. 전 유럽을 충격과 공포에 떨게 하던, 그리고 긴 항해덕에 꽤 오랜시간동안 약탈에 굶주린 흰 늑대 부족들이었다. 오트리치들은 다른 세계 사람들이 약탈받으며 느끼던 그 감정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더군다나 그 상황을 그저 지켜볼 수 밖에 없는 동쪽 바다의 빛은 정신상태가 온전할 리 없었다. 동쪽 바다의 빛은 하염없이 울고만 있다가 번뜩 든 생각에 고개를 들고 몸을 일으켜 뒤돌아 뛰기 시작했다.

"대전사님..! 대전사님이라면...!"

그녀에게 마지막 남은 희망은 그녀의 친구인 붉은 수수밭과 대전사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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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어져라 이 날파리같은 년아!"

애꾸눈 울란은 하늘을 향해 투척용 도끼를 휙휙 던져댔다. 그러나 조준을 아무리 정확히 해도 허공에서 자유롭게 활공중인 대전사는 가볍게 도끼를 피할 뿐이었다. 울란은 도끼가 빗나간걸 깨닫고 재빨리 몸을 숙였다. 몇 초 지나지 않아 울란이 엄폐하던 큰 나무가 줄기째로 박살나 쓰러졌다. 대전사의 망치가 날아들었던 것이었다.

"우르프! 우르프! 살아있냐?"

울란이 옆 바위에 숨어있던 친구 우르프를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울란은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으며 엎드린 몸을 살짝 일으켜 박살난 나무둥치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박살난 동료들의 시체가 산처럼 쌓여있었다. 자그마치 백 삼십명 가량이 저 괴물같은 새인간과 맡붙어 싸우다가 저 꼴이 나버렸고, 남은 이십여명이 채 안되는 인원들은 탁 트인 길을 피해 옆의 수풀속으로 숨어들어 도끼나 화살을 새 인간에게 날려대고 있었다.

"예라이, 썅! 떨어지라고!"

울란은 벌떡 몸을 일으켜 다시 도끼를 던졌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울란의 머리도 허공에서 날아온 망치에 산산조각 나버리고 말았다.

"... 상대해 보았던 그 어떤 이방인들보다 강인한 존재들이다."

대전사는 울란을 파괴하고 돌아오는 망치를 다시 받아들며 중얼거렸다. 무리들 중 대다수와 길 위에서 맡붙어 싸울 때, 대전사는 오래전에 잊었던 목숨을 건 전투의 전율감을 다시 맛 볼 수 있었다. 달려들어 무기를 휘두르는 자세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고. 그들의 반수 이상을 처참하게 때려죽였을 때 조차 사기가 줄기는 커녕, 나도 어서 죽여보라는 식의 공포스러운 광소와 함께 무기를 부딛혀오는 기백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오트리치들에게 호전적으로 대한 이방인과 산맥 아래의 오크들은 대전사가 날아들어 수십 명 정도만 본보기로 해치우면 알아서 자기네 땅으로 겁먹고 달음박질 치던 겁쟁이들 뿐이었다.

"더 이상 날아다니면 오히려 위험하겠군."

대전사는 숲에서 날아오던 화살을 가볍게 피하고는 머리위에서 계속해서 우르릉 우르릉 울어대는 먹구름을 바라봤다. 아무리 무적의 대전사라도 하늘이 내리는 천벌인 낙뢰에 맞으면 무사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아까부터 내려가기 위해 고도를 낮추기도 했지만 그 때마다 기다렸다는 듯 도끼와 화살이 집중적으로 날아들어 제대로 땅에 안착할 수 없었다. 대전사는 왠지모르게 슬슬 불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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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흰늑대 벨니크와 그의 아들 순록뿔 로바즈는 부족 전사들과 토르의 망치를 든 새인간이 싸우는 동안 싸움터 옆에 보이던 가파른 절벽 위로 은밀하게 뛰어올라갔다. 절벽 끝에 다다르자, 날아디니고 있는 새 인간과 수풀에 숨은 전사들이 서로 망치와 화살을 주고받으며 싸우는 모습이 위에서 보였다. 로바즈는 아버지에게 흰색 창날이 달린 달린 창을 건네줬다. 로바즈가 태어나기도 전인 먼 과거에, 벨니크가 부족을 치범한 흰 늑대 무리의 우두머리를 해치우고 그 뼈를 갈아만든 창이었다.

"아버지. 계획하신 대로 제가 먼저 뛰겠습니다. 아버지께서 마무리를 해주십시요."

그러나 벨니크는 나아가려는 아들의 손목을 붙잡아 멈췄다.

"내가 먼저 가마."
"하지만-"
"토르님의 뜻이다."

로바즈는 먼저 뛰어 미끼가 되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것인지 잘 알고있었다. 그렇기에 애초에 계획을 세울 때 자신이 먼저 뛰려 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토르님의 뜻' 핑계. 벨니크가 아버지로써 아들에게 하는 걱정을 담아 하는 그 핑계에 로바즈는 거역할 수 없었다. 로바즈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곤 아버지가 건네는 뼈창을 받아들었다.

벨니크가 검을 들고 절벽 끝을 향해 뛰었다. 뒤이어 로바즈도 창을 고쳐잡고 뛰기 시작했다. 계획은 벨니크가 먼저 뛰어내리며 대전사를 공격하려 하면, 대전사는 그를 향해 망치를 던지거나 휘두를것이었고, 뒤이어 뛰어내리는 로바즈가 무기가 손에 없거나 빈틈이 생긴 대전사를 창으로 꿰어버리는 식이었다. 벨니크는 물론 로바즈의 생명도 보장할 수 없는 그런 대담하다 못해 무모한 계획이었다.

"기야아아아아아!!!!"

뛰어오른 벨니크가 크게 소리지르자, 대전사가 뒤돌아 올려보며 망치를 던졌다. 빙빙 돌며 허공을 가르는 망치는 벨니크의 검을 든 팔을 강타했고, 그대로 그 팔은 뜯어져 날아가고 말았다. 벨니크가 비명지르며 땅밑으로 추락하기 시작한것은 당연지사였다. 후속해서 뛴 로바즈는 아버지의 고통스러운 목소릴 애써 외면하며 창끝을 대전사의 심장을 향해 겨누며 떨어졌다. 

그러나 뭔가 이상했다. 망치가 벨니크를 때린 부근에서 괴상한 각도로 휘어 날기 시작하더니 로바즈를 향한 것이었다. 종전까지 보았던 유선형 회전과는 판이하게 다른 움직임이었다. 로바즈는 아차하면서 창으로 망치를 막으려 했지만 망치는 창을 반토막내며 가까스로 로바즈만 피해 대전사를 향하려 했다. 로바즈는 창도 놓치고 중심도 잃어 공중에서 빙글빙글 돌며 추락하고 있었다. 로바즈의 머릿속에 절망이 가득찼다.

이대로 모두 죽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자신을 위해 희생했음에도 그 성과를 내지도 못하고 그냥 떨어져 죽는것이었다. -까지 생각한 로바즈의 눈에 자신을 때린 뒤 새인간의 손으로 다시 날아드는 묠니르와 하늘에 잔뜩 낀 먹구름, 그리고 그 속에서 울고있는 천둥번개가 보였다.

"이 모든게 토르님의 뜻이다..!"

로바즈는 그의 아버지나 할 법한 말을 내뱉으며 돌아오는 망치에 손을 뻗었다. 기적적으로 망치의 손잡이가 로바즈의 손에 잡혔고, 로바즈는 회전하던 망치의 힘으로 자세를 바로 잡을 수 있었다. 그대로 망치를 두 손으로 잡아 머리위로 힘껏 치켜든 로바즈의 앞에 망연자실한 표정의 대전사가 보였다.

그리고 망치가 대전사를 향해 내리찍혀지는 순간, 먹구름 사이에서 낙뢰 한 줄기가 떨어져 망치에 닿았다. 일개 염력 주술이 달린 전투망치가 순간이지만 진짜 묠니르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낙뢰를 머금은 망치를 맞은 대전사는 그대로 땅으로 추락했다. 땅에 풀썩 쓰러진 대전사가 피와 함께 흰 연기를 울컥 토해냈다. 그 옆으로 망치- 아니, 묠니르를 든 로바즈가 내려앉았다. 끉어질 듯한 숨을 내뱉으며 피를 토해내는 대전사를 로바즈는 계속해서 노려봤다. 뒤이어 숲속에서 그 광경을 지켜 본 전사들이 속속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한 쪽 팔을 잃은 벨니크도 어딘가 꼭꼭 숨어있었던 재간꾼 우르프의 부축을 받아 로바즈의 곁으로 다가왔다.

"아버지."
"내 아들아."

로바즈는 다가서는 아버지에게 아까 부러져 떨어진 뼈창을 내밀었다.

"마무리는 아버지께 양보하고 싶습니다."

벨니크는 한 쪽 팔을 잃은 고통도 잊은 채 미소지으며 창을 받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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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사는 자신의 망치를 든 전사가 부러진 창을 늙은 전사에게 건네는 모습을 무력하게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피가 한웅큼 더 울컥 쏟아져나왔다. 한 쪽 팔 밖에 남지 않은 늙은 전사는 창끝을 천천히 자신을 향해 겨눴다. 대전사는 눈을 감았다. 최후가 다가오고 있었다.

"...미안해, 짝눈아."

붉은 수수밭은 목 메인 목소리로 나지막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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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절박한 최후의 희망 하나만으로 다시 있던자리에 돌아온 동쪽 바다의 빛은 그녀를 찾는듯한 눈빛의 눈을 게슴츠레 뜬 채 바닥에 피투성이가 되어 누워있는 친구의 모습 앞에 무릎 꿇었다. 그리고 친구의 시신을 안아들며 흐느꼈다. 최후의 희망조차 사라진 상황이었다.

"동쪽 바다의 빛아."

갑자기 뒤에서 나는 소리에 동쪽 바다의 빛은 놀라 뒤돌았다. 그곳엔 그녀의 삼촌 까마귀의 눈이 피투성이가 된 채 서 있었다. 비단 피투성이 뿐 아니라 오른쪽 다리는 뒤쪽으로 흉하게 꺾였고, 몸 이곳저곳이 만신창이였다.

"삼촌!"
"어서 도망쳐라. 부족민들도 마을을 버리고 흩어지고 있어."

심하게 다친 몸으로 까마귀의 눈은 용케 말을 잇고 있었다.

"죄송해요 삼촌... 죄송해요.."

동쪽 바다의 빛 은 삼촌의 발치 앞에서 엎어졌다. 까마귀의 눈은 그녀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네가 잘못한게 아니다. 우리들이 너무 오만했던 탓이지. 이제 어서 가거라. 어디든 좋으니 어서 도망쳐..."

거구의 몸이 서서히 무너지려 했다. 동쪽 바다의 빛은 삼촌의 몸을 부축했다.

"하지만 삼촌은.."
"네가 어렸을 적, 내 실수 때문에 이방인들이 네 어머니와 아버지를 해친 일을 잊은거냐? 너까지 이방인들의 손에 어떻게 되길 놔둘 수는 없어. 어서 가라!"

까마귀의 눈이 동쪽 바다의 빛을 떠밀었다. 그러나 동쪽 바다의 빛은 붉은 수수밭의 시신과 삼촌만을 번갈아 보며 머뭇거릴 뿐이었다. 까마귀의 눈은 매섭게 소리질렀다.

"도망쳐라! 이 바보같은 녀석아!"
"다시 돌아올게요..! 꼭! 삼촌과 붉은 수수밭을 데리러!!!"
"그런 허튼생각은 하지 말라니까!!!"

동쪽 바다의 빛은 마지막의 말을 들었는지 듣지 못했는지 산맥 밖을 향해 뛰어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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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킹들의 약탈은 철두철미했다. 마을을 두르고 있던 방책들은 역청 항아리를 몇개 더 터뜨려 완전히 소각시켜버렸고, 주민들이 살던 천막과 구조물은 망치로 때려부수고 불로 태워 터조차 남지 않도록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살고 있던 주민들 중 운좋은 부류들은 마을맊으로 도망칠 수 있었지만 반수 이상이 잡히거나 죽임을 당했다.

그나마 약탈 중 창칼에 맞아죽은  사람은 사로잡힌 사람들보다 운이 좋은 편이었다. 나중에 합류한 바이킹 무리들이 족장인 벨니크가 연회 중 독 섞인 술을 마셨고, 전투중에 한쪽 팔까지 잃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사로잡힌 무리들에게 그 분풀이를 했기 때문이었다. 오트리치 남성들은 극심한 고문끝에 모조리 참수되어 마을 한가운데에 목이 탑처럼 쌓이게 되었고, 여자와 어린이들은 모조리 범해진 뒤 죽여 꼬챙이에 꿰인 채 목 무더기 주변에 전시되었다. 

그리고, 마을을 탈출해 산맥 밑으로 내려간 부족들의 일원들마저 원래 오트리치들과 사이가 나쁘던 오크들에게 사로잡혀 끔찍한 꼴을 당하고 말았다. 그 날,  오트리치들은 혈통을 유지하기엔 턱없이 모자른 수만을 제외하고 멸족해버리고 말았다. 

-----

"우엑, 할아버지. 잠깐만요."
"내가 뭐랬니. 무섭다니까."
"아니요 할아버지. 그래도 어린애한테 그걸 그대로 이야기 하는 사람이 어디있어요? 무서운걸 넘어서 잔혹하잖아요!"

노인은 머릴 긁적이며 딴청을 피웠다.

"그...그런가?"
"내 친구들이 들었으면 이야기 중간에 울면서 도망쳤을걸요? 밤엔 잠도 못잘테고!"
"알았다, 알았어. 이 할애비가 미안해. 미안하대도!"

노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꼬마는 귀를 틀어막았다.

"그나저나 이걸 다 어떻게 아신거에요?"

꼬마가 귀를 막은 채로 질문했다. 노인은 간단히 대답해줬다.

"당사자에게서 직접 들었단다."
"당사자 누구요? ...잠깐. 적어도 구백년은 지난 이야기인데 당사자라뇨...?!"
"진정해라 인석아. 네가 읽은 책엔 오트리치에 대해 하나만 적고 둘은 안 적었나보구나."

노인은 검지손가락을 세워 콧등의 안경을 올렸다.

"오트리치들은 엘프들처럼 굉장히 수명이 길단다. 난 한명만 봐서 모르겠다만 어쩌면 엘프들보다 명줄이 더 길 수도 있을게야."

꼬마의 눈이 커졌다.

"그럼 진짜 오트리치를 보신거에요?"
"암. 오트리치의 마지막 혈통이었지. 그 사람의 임종을 직접 지켜봤어. 천사백삼십살을 일기로 미가스 마법학회에서 돌아가셨단다."
"천사백삼십... 우와..."
"약탈자들에게 멸족당할 당시에 오백 이십세였다고 했었고, 그 사람 임종 때 내가 쉰 다섯이었으니 지금 일흔 여덟인 내 나이 기순으로 오트리치들은 지금부터 구백삼십삼년전에 멸족된 셈이지. 구백년이라니, 숫자 때려맞추길 제법 잘 하는구나."

꼬마는 아직도 입을 헤 벌린 채 경악중이었다. 노인이 장난스레 손가락을 꼬마 입속에 쏙 집어넣으려 하자 꼬마는 그제서야 입을 합 다물며 손가락이 들어가는 걸 막았다. 노인은 손자의 귀여운 모습에 껄껄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은 부족들이 살던 삼스산맥에서 계속 살고 있다가 미가스 마법학회 탐험대에게 발견되어서 반쯤 억지로 끌려왔다지."
"불쌍해라. 그런데 동족들도 하나 남지 않은 곳에서 대체 뭘 했대요?"
"수수께끼의 약탈자들이 모두 동쪽의 시피캡 대양으로 다시 떠난 뒤에 돌아와서는 동족들의 시신을 수습했다고 하지. 수 만구 이상의 시신을 혼자서 처리했던게야."

갑자기 꼬마가 박수를 짝 치며 소리쳤다.

"삼스산맥의 대규모 돌 고분!"

노인도 손자가 하는 말에 손가락을 튕기며 맞받아쳤다.

"그렇지! 역시 내 손자라서 영특하구나."
"오백년 전에 미가스 마법학회 탐험대가 삼스산맥의 오크 군락을 피해 탐험하다가 발견한 유적지잖아요. 오크 군락 틈에 있으면서 안에 있던 유골은 인간도, 오크도 아니었던 무덤 유적지!"
"그걸 그 한사람이 다 지었던거지. 오크들이 슬슬 산맥위로 올라오며 그곳에 터전을 잡는 도중에도 말이야."

소년은 머리에 손을 짚었다. 역사책에서나 배우던 이야길 직접 인과관계까지 알며 들으니 과부하가 걸릴 지경이었다. 소년의 얼굴이 흥분에 상기되자, 노인은 빙긋 웃으며 물잔을 건넸다. 소년은 단번에 물을 들이켰다.

"후아. 어지럽네요. 근데 엄청 재밌어요."
"나도 마찬가지구나."

노인은 말하며 소년을 번쩍 안아들었다.

"그래도 이젠 자야지, 존? 너무 늦게 자면 키가 안커요."

소년은 하품을 크게 하며 노인에게 순순히 안겼다. 오늘 밤의 이야기로썬 충분했던것이었다. 소년은 자신의 방에 거의 다 다다랐을 때 할아버지에게 넌지시 물었다.

"할아버지. 진짜 마지막으로 물어볼게 있는데요. 만명이 넘는 동족들의 시신을 정리했다던 그 남자, 이름이 뭐에요?"

노인은 침대에 소년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남자가 아니라 여자란다. 이름은 탐험대에게 잡힌 이후로 아무에게도 자기 이름을 말하지 않았기에 알 수가 없었다. 그 사람 말로는 '내 이름은 저주받을 이름이야.' 라며 절대로 말하지 않았지. 다만, 오른쪽 눈이 시피캡 대양의 푸른색을 그대로 본뜬 듯한 영롱한 색이었지. 늙었지만 굉장히 아름다운 사람이었어."
"여자라구요?! 잠시만-"

노인은 손자를 억지로 눕혀 이불을 덮어주고는 재빨리 자리를 뜨며 말했다.

"네가 말한 진짜 마지막 질문은 이미 대답했다! 허허허!"
"할아버지? 할아버지! 으으.. 이방인들이 왜 그냥 떠났는지도 못 물어봤는데..."

소년은 머릴 잡아 헝클어뜨리며 고뇌속에 잠겼다. 그러나 이불속에서 뒤척거리는 것도 잠시뿐. 곧 소년은 새근새근 숨을 내쉬며 잠에 빠져들었다.

-----

"이곳에서 우리가 받은 소임은 모두 끝이났다!"

흰늑대 벨니크는 아들 로바즈가 하늘 높이 치켜든 전투망치를 가리키며 모인 부족민들 앞에서 외쳤다.

"토르께서 잃어버리신 묠니르를 우리 손으로 되찾은 것이다!"

부족민들도 손을 번쩍 들어 만세하며 살아생전에 볼 수 없을것이라 생각했던 묠니르의 실물을 보고 열광했다. 벨니크는 한쪽만 남은 팔로 하늘을 향해 손을 뻗치며 재차 외쳤다.

"그리고 우린 묠니르를 고향으로 가져가 토르님께 돌려드릴것이다! 드디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고향으로 묠니르를 가지고 가는게 왜 토르께 반납하는것과 연관있는지는 아무도 지적하지 않았다. 그저 다들 북해와 침엽수림이 기다리고 있는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기뻐할 뿐이었다. 그렇게, 흰늑대 부족들은 그들이 들어왔던 동쪽 해안을 통해 한명도 남김없이 이 대륙에서 떠나버리고 말았다. 이 바이킹 무리들이 대륙에 남긴 것이라곤 화장시켜 땅에 흩뿌린 죽은 그들의 동료들 뿐이었다.

-----

"우현으로- 우현으로 꺾어라! 이런 제길, 얀세에에엔!!"

대륙을 들어올 적 흰늑대 부족을 귀찮게 하던 거센 폭풍은 나갈 때도 어김없이 그들을 맞이해줬다. 다만 다를 게 있다면 저번 폭풍의 몇 배는 센 듯한 폭풍이 그들을 맞이한 것이었다. 들어올 때는 맘대로였겠지만 나갈 때는 아니라고 폭풍이 말하는 듯 대형 롱보트들은 벌써 반 수 이상이 파도에 잡아먹혀 박살나거나 선단을 이탈해 실종되고 말았다. 그리고 방금은 로바즈의 친구인 얀센이 탄 롱보트의 용골이 산산조각 나버리고 있던 와중이었다.

로바즈의 지휘에도 배들은 파도에 한대 한대씩 먹혀나가고 있었다. 로바즈의 지휘능력이 부족한게 아니었다. 북소리조차 새나가지 못하게 퍼붓는 빗줄기와 바다괴물을 연상케 하는 거대한 파도, 불가항력에 가까운 이 자연의 힘에 무력한 인간인 탓이었다.

"좌현- 아니, 계속 가!"

로바즈도 반 쯤 정신을 놓은 상태에서 횡설수설 하고 있었다. 그 때, 선수상을 꽉 잡은 그의 뒤로 누군가 천천히 다가서서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로바즈가 뒤를 돌자 그의 아버지 벨니크의 얼굴이 억수같은 빗속에서 보였다. 벨니크는 악천후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한 표정과 눈빛을 하고 아들에게 말했다.

"묠니르를 이리 주거라, 아들아. 토르님께 돌려드릴 때다."

로바즈는 또 다시 옆에서 힘없이 가라앉는 롱보트 한대를 망연자실하게 바라보다 선수상에서 내려와 허리에 매달아놓은 망치를 풀어 떨리는 손으로 아버지에게 건넸다. 벨니크는 말없이 망치를 받아들고 아들이 있었던 선수상에 올라타 망치를 높게 쳐들었다.

"토르시여! 잃어버리신 묠니르가 여기 있나이다! 이걸 제 자신의 영광을 위해 쓰려 했던걸 용서하시고 부족민들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굵은 번개줄기 하나가 벨니크의 머리위로 떨어졌고, 벨니크는 큰 섬광과 함께 선수상과 함께 사라져버리고 말핬다. 물론 그가 묠니르라 굳게 믿은 전투망치도 함께 사라졌다. 로바즈는 아버지가 삽시간에 사라져버린 상황에 어리벙벙해져 지옥같던 폭풍우가 마법처럼 멎어버린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멍하니 주저앉아있는 로바즈를 뒤에서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그 광경을 같이 목도한 고수가 다가와 위로했다.

"지금쯤 발할라에 가 계실겁니다..."

로바즈는 손으로 얼굴을 부여잡으며 흐느꼈다. 로바즈가 탄 롱보트 주변에 남아있는 다른 롱보트는 고작 두 대였다.

-----

"헤임달. 저거좀 봐봐. 깃발이 낯익은데."
"엉? 저건 흰 늑대부족 깃발이잖어?"
"여기서 수년전에 떠난 그 등신들? 옛날엔 잘나갔다던데 왜 한 척 밖에 없는거지."
"낸들 아냐. 쨌든 항구로 들어오니까 불이나 비춰주자고."

헤임달은 숯불에서 불씨를 꺼내 봉화 화로가에 집어던졌다. 곧이어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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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같이 선명한 붉은 머리를 한 사내가 다 부서져가는 대형 롱보트에서 내리는 꾀죄죄한 몰골의 수십명을 자못 반갑다는 투로 맞았다.

"이런, 이런, 이런! 이분들이 누구시더라? 전 유럽을 공포에 떨게하던 흰 늑대 부족 아닌가?"

붉은 머리의 사내는 낄낄 웃으며 박수쳤다. 그의 앞에 거지꼴을 한 무리의 선두가 지친기색이 역력한 채로 다가서며 말했다.

"붉은 머리 에릭."
"용케 기억하는군, 순록뿔 로바즈."

로바즈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눈앞의 큰 선착장과 멀리 우뚝 서있는 큰 성채를 죽 둘러봤다.

"출세했군..."
"그래, 그래. 네놈들이 한꺼번에 자릴 비우니까 그 후론 말뚝박기 놀이가 쉬워지더라구. 서로 칼질할 필요도 없고 말이야."

에릭은 껄껄 웃었다.

"그래..."
"여행은 어땠나? 자네 부친이나 눈에띄던 전사들이 안보이는걸 보니 다들 발할라에 꿀술 얻어먹으러 간 것같은데."

로바즈는 예전같으면 바로 도끼를 꺼내들어 말을 한 상대의 대갈통을 쪼개버릴 상황이었지만 놀랍게도 담담하게 대답했다.

"토르님이 주신 임무를 수행하고 왔지."
"아아, 이런데서 이야기하지 말고 들어와서 고기랑 술좀 배에 채우면서 이야기하지. 이야기 다 하고 나서 천천히 바다로 꺼져주시면 되니까."

로바즈는 쓴 웃음을 지었다.

"한 때 서로 칼 맞대던 사이엔 그 정도밖에 못 해주겠다는건가. 고맙군."
"음- 맘이 바뀌었어. 식사까지 하면서 이야길 들으면 더 오래있을테니. 가면서 이야길 들어야겠는걸. 그래야 네 면상 볼 시간도 더 짧아지겠지. 시작해."

로바즈는 에릭을 따라 걸어가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대서양을 건너 발견한 처음 보는 땅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보게됬지. 피부는 붉고, 알록달록한 색으로 화장을 했는데, 머리엔 새 깃털이 무성하더군. 원뿔모양의 천막에서 살던 사람들이었는데..."

----

붉은 머리 에릭은  눈밭만이 펼쳐진 광활한 평야를 바라보며 기지개를 쭉 폈다.

"에릭님! 제발!"
"제 발은 무슨. 네 발로 여기 왔잖어. 얌마, 뭐하니?"
"예, 알겠습니다."

에리크 옆에 꿇여엎어져선 결박되어 있던 남자의 머리통이 내려쳐진 묵직한 도끼와 함께 분리되어버렸다. 한 때 에릭의 기함에서 항해사였던 사람의 최후였다.

"대서양에서 서쪽으로 가라는데 동북쪽으로 가는 새끼가 세상천지에 어디있담. 아, 여기 있었지."

에릭은 굴러다니는 머리통을 툭 차버렸다.

"그나저나 여기도 임자없는 땅이긴 하군. 있는게 눈 뿐이지만."

에릭 옆에 소년 한명이 다가섰다. 에릭은 다가선 소년의 언 귀를 손으로 문질러 데워주며 말했다.

"에이릭손. 내 아들내미. 네 애비 친구놈 말대로 따라왔더니 새 인간은 무슨 허연 허허벌판밖에 없는 것 같다."

에릭은 '친구놈' 이야기를 하며 기함 선수상에 꽂혀진 사람의 두개골을 살짝 쳐다봤다. 그러자 에릭의 아들 에이릭손이 대답했다.

"여기는 일단 사람들이 이주하기 좋게 양념 좀 쳐서 이름을 그린란드라고 짓는게 좋겠는데요, 아버지. 눈밖에 없다고하면 아무도 안올거 아녜요?"

그 영악한 소리에 에릭은 아들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며 웃어제꼈다.

"그래. 그래. 자식이 날 닮아서 머리는 좋아. 에이릭손, 이 애비는 탐험질엔 질렸다. 애비 친구놈이 찾았다던 새 인간이 사는 땅은 네가 나중에 커서 꼭 발견해야 한다?"
"예, 아버지."

붉은 머리 에릭의 아들 레이프 에이릭손은 시린 손에 입김을 불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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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tivated by - 스타크래프트 2, 북유럽 신화, 빈란드 사가(유키무라 마코토 作), 체로키.아파치.수.라코타 족, 포카혼타스(디즈니), 관우(삼국지연의), 바이바이 바이킹(앗! 시리즈), 붉은 수수밭(모옌 作), League of Legends(라이엇 게임즈), 곽진수(in 로스트), MBC뉴스데스크 폭력성 실험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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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몹쓸 용량제한같은. 수정완료.(3)

이종족 모에분들, 하피의 젖으로 술을 만든다는 말을 보고 이상한 생각은 하지 마세요. -뭐

드디어 옮겨적기 완료. 꽤 기네요. 어허허허헣. 세계관 설명 + 논픽션에 핀트를 두고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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