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파 시리즈] 더러운 손 ①

로크네스 0 2,530
 
평소보다 조금 더 부도덕한 묘사가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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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운 손
 
내가 예전부터 생각하던 게 하나 있어. 뭐냐 하면, 현재 인류는 교통수단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는 거야. 자동차는 물론이고 기차, 비행기, 여객선, 그런 다인승 교통수단의 존재가 인류의 몸과 마음을 좀먹고 있어. 걷고, 뛰고, 근육이 비명을 지르고 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벗어나 편하게 앉아서 목적지까지 향하는 건 결코 자연스러운 게 아니야. 헛소리라고? 그래, 헛소리지. 순도 백 퍼센트의 헛소리지. 진심을 말하자면 물론 이래.
“도대체 언제 도착해요, 교수님? 심심해 죽겠네!”
“이제 30분 지났어요.”
30분! 1800초! 어마어마한 시간이잖아! 2년 전 벨기에까지 비행기 타고 오기까지의 그 끔찍한 시간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긴 하지만, 어릴 때 설날에 친척집까지 갈 때 막히는 고속도로 안에서 보낸 지옥에 비하면 여전히 아무것도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30분이라는 시간은 자동차에 갇혀서 보내기에는 너무 길어. 지난번에 바뇌로 갈 때는 늦은 밤이어서 잠이라도 잤지, 지금 같은 경우는 말할 필요도 없이 굉장히 지루하다고. 덧붙이자면 8월 들어서 알게 된 건데, 실험가운은 통기성이 별로 좋지 않아서 날이 더울 땐 끈적거리네. 그냥 벗어버릴까.
“다시 입으세요. 더운 건 알겠지만, 다른 사람도 있잖아요.”
이런 반응 나올 줄 알았지. 교수랑 둘이만 탄 거였으면 속옷까지 벗어버렸을 텐데, 지금 이 승합차에 타고 있는 사람이 한 명 더 있거든. 남자고, 교수랑 비슷하게 나이가 들었고, 정장으로 몸을 빈틈없이 감싼 데 더해 옷으로 가려지지 않는 얼굴에마저도 빈틈없이 굳은 표정으로 완전무장을 한 걸 보니 굉장히 지루한 사람인 게 분명하지. 저런 사람과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호흡곤란이 올 것 같아. 가능하면 목소리만은 듣고 싶지 않은데, 이런, 말을 하잖아.
“긴장이 안 되나? 네가 곧 만나게 될 사람은 평범한 녀석이 아닌데.”
으으, 저 목소리 좀 들어 봐. 기계가 말하는 거 같잖아. 사법 관계자, 그 중에서도 정말로 중요한 사건만 담당하는 높으신 분다운 목소리야. 딸이 꽃병이라도 깼다간 기물파손죄로 고소해서 손해배상을 청구할 사람이 분명하다고. 게다가 ‘곧’ 만날 사람이라니, 아직 도착도 안 했거든?
“이 나라 최악의 범죄자를 만나러 가는 거다. 강간범, 소아성애자, 연쇄살인마, 지능적이고 교활하고 폭력적인 괴물이란 말이다.”
그래서 어쩌라고. 괴물이 차 안에 있는 것도 아닌데, 내가 옷을 못 벗는 게 그 사람이랑 무슨 상관이 있냔 말이야. 말은 딱딱한데 논리가 하나도 없네.
“지금부터 긴장해야 한다는 거다. 그 여유로운 태도, 녀석을 흥분시킬 만한 옷차림,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녀석을 만났을 때는 진지하게 하길 바란다. 이번 수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너에게 달려 있으니까.”
네, 네, 알겠습니다. 교수는 곧바로 나한테 너무 큰 부담을 주지 말라면서 남자랑 싸우기 시작했고, 나는 그 지루한 소리가 듣기 싫어서 귀를 막아버렸어. 차는 내가 원하는 것보다 훨씬 느리게 달렸고, 그래, 전부 무시하자. 목적지까지 가는 길이 아무리 지루하고 목적지가 아무리 지루한 곳이라도 지금 나한테는 갈 이유가 있는 거잖아. 벨기에에 처음 올 때가 그랬고, 지금도 그런 상황이니까 어쩔 도리가 있나. 참는 수밖에.
 
그러니까 상황을 조금 정리해 보도록 할게. 지금은 8월 14일, 공휴일인 성모승천대축일을 하루 앞둔 날이야. 동시에 루벤에서는 사람이 우글우글 몰리는 음악 페스티벌 ‘마크트록’이 열리는 중이기도 하지. 그 페스티벌이 유럽 전역에서 얼마나 유명하고 얼마나 유명한 뮤지션들이 많이 참여하는지에 대해서 내가 하등의 관심도 없으리라는 건 이미 알고 있겠지? 유학생 그룹이 오늘 아침에 단체로 모여서 출발하게 되어 있었고, 나는 거의 몇 주 전부터 여기에 참여하지 않으려고 온갖 수를 생각해두고 있었어. 좋은 변명을 생각해내지 않으면 비엔나 봉봉은 반드시 나를 저 지옥으로 질질 끌고 갈 거니까. 쓸데없이 감은 좋아서 어설픈 거짓말이나 꾀병은 또 안 먹히더란 말이지. 귀찮은 여자라니까.
그래서 바로 며칠 전 금요일에도, 어떻게 하면 마크트록에 끌려가지 않을까 고민하면서 아침 상담을 받으러 갔는데, 교수 사무실 안에서 말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살짝만 열고 훔쳐보니까 글쎄 낯선 사람이 하나 있더라고. 심장이 멈춰버릴 것처럼 지루한 정장 차림의 지루한 아저씨, 그래, 지금 차를 운전하고 있는 그 사람이었어. 이렇게 말하고 있었지.
“스텔라, 네 협조가 필요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잖아?”
그리고 교수는 반박하는 중이었고,
“아직 어린애야. 그리고 치료에 진전도 없어서 굉장히 불안정하기까지 해. 당장 흉악범하고 만나게 할 수는 없어.”
남자는 더욱 필사적으로 반박하고 있었어.
“그 애가 어떤 앤지 알아, 스텔라. 네 논문을 읽었다고. 죄책감도 없고 가학적이고 잔인하고 범죄적인 노출광. 어린 여자아이가 흉악범과 대면해서 단서를 이끌어내야 한다면, 이 벨기에에 그 애만큼 적합한 애는 내가 아는 한에서는 없어.”
세상에, 저런 모욕적인데다가 근거까지 없는 비난이 공공연하게 자행되고 있다니. 모욕을 당한 당사자로서 이 시점에서 나서줘야 할 필요성이 느껴지잖아. 문을 벌컥 열면서 짜증 가득한 목소리로,
“노출광은 아니거든요, 아저씨.”
실험가운 안에 속옷만 입고 다니긴 하지만, 속옷 위에 실험가운은 확실히 입고 있거든요? 갑작스러운 난입에 남자는 살짝 당황한 기색이었지만, 지루하리만치 빠른 속도로 평정을 되찾았어. 남을 노출광이라고 불렀던 주제에 침착한 척 하면서 나한테 악수를 청하는 게 아주 기분 나빠. 그래서 좀 철저하게 무시하기로 마음먹었지. 악수도 받아주지 않고, 말도 안 붙이고.
“이 이상한 사람 누구에요, 교수님?”
교수를 이름으로 부르는 걸 보면 옛 친구나 그런 거겠지? 내 예상이 맞았어. 교수의 대학 동기인데, 지금은 경찰에서 일하고 있다더라고. 교수한테 중요한 부탁이 있어서 이렇게 찾아왔다나. 그 중요한 부탁이 뭔지 아까 엿들은 것만으로는 조금 알기가 힘들었는데, 뭐 그거야 기다리면 설명이 나올 일이지. 곧 남자가 무슨 서류를 펄럭펄럭 넘기면서 입을 열었어. 와, 목소리도 중저음이라 짜증나.
“최근에 ‘핸드픽커’가 체포된 건 알고 있겠지?”
설명을 할 때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가정하고 하란 말이야, 멍청아. 내 표정을 읽은 남자는 한숨을 가볍게 쉬더니(누가 할 일인데!)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어. 그리고 이건 아주 조금 덜 지루한 이야기였어.
“지금으로부터 30년도 더 전에, 성폭행 흔적이 있는 여자아이들의 시신이 발견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총 서른다섯 구, 초등학교도 안 들어간 애부터 중학생까지, 사람이 없는 도로변이나 강에서. 발견된 장소는 벨기에 전역이었지만 모든 시신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기에 단독범의 범행으로 결론지어졌지. 아이들의 양 손이 전부 잘려 있었던 거다.”
몇 년에 걸쳐서 범행을 저지르면서도 잡히지 않은 그 범인에게는 아이들의 손을 가져간다는 의미에서 ‘핸드픽커’라는 별명이 붙었다. 범인은 아이들을 공원이나 공공장소에서부터 미행하다가 어느 순간 납치했고, 항상 똑같은 수법으로 강간 살해했다. 부검 결과 모든 아이들은 과다출혈로 죽었고, 범인은 먼저 아이의 양손을 자른 뒤 죽을 때까지 강간한 것으로 밝혀졌다. 진짜로 이 남자 이런 말투로 말했다? 무슨 다큐멘터리 내레이터야?
“그런데 30년 동안이나 못 잡았어요? 와아, 이 나라 수사능력을 알 만하네.”
“30년 전에 돌연 범행을 멈추고 사라졌으니까. 그러다가 바로 며칠 전에 범행을 재개했는데, 이번에는 목격자가 있어서 아이가 납치당하기 전에 붙잡힌 거다. 64세의 레오폴드 브리에르. 신분을 세탁한 채 지내고 있었지만, 가택 수색을 했더니 확실한 증거품이 나왔지.”
모든 피해자들의 소지품, 그리고 말라비틀어져 미라가 된 작은 손 서른다섯 쌍. 이 얘기를 하면서 남자는 아주 가볍게 몸을 떨었어. 나는, 뭐, 사실 크게 감흥은 없었고. 몇 달 전이었다면 아마 엄청 흥미를 가졌겠지만 지금은 좀 그렇거든. 범죄자 얘기, 이젠 질렸어. 지루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걸. 생각을 하면 할수록 우울해질 뿐이라고. 우울함이 도저히 가시지를 않아서 물건을 부수는 빈도도 늘었단 말이야. 기숙사 관리인 표정이 점점 썩어가고 있다니까. 그런 상황에서 지루한 사람이 지루한 범죄자 얘기를 가져왔으니 내 기분이 어떻겠어? 비아냥거리고 싶은 기분밖에 안 들지.
“그런데 왜 저한테 왔어요? 승진 축하받고 싶어서?”
“그걸 생각하기에는 아직 남은 일이 있다.”
그러니까 승진 생각이 없는 건 아니란 거네!
“범인의 집에서 지금까지 알려진 희생자들의 소지품 이외에도 신원을 확인 가능한 다른 아이 세 명의 소지품이 발견되었다. 조회 결과 30년 전에 실종된 아이들의 명단에 있는 이름이었고, 정황상 놈의 희생자가 된 것은 확실하지만 놈의 집에서 그 아이들의 손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 애들도 죽였는지, 죽였다면 시신은 어디에 유기했는지, 그걸 알기 전까지는 수사를 종결지을 수 없다는 거죠? 하지만 저는 아는 바가 전혀 없으니까 범인한테 직접 물어보지 그래요?”
“바로 그 부분이 문제다. 놈은 전혀 말을 하려고 하지 않아. 무슨 질문을 해도 똑같은 대답만을 반복한다.”
드라마틱하게 말을 끊은 걸 보니 내가 뭔데요? 하고 물어보기를 바랐겠지만, 글쎄, 난 그럴 생각이 없는데. 내가 물어보지 않아도 어차피 말할 거잖아? 실제로도 그렇게 했고.
“내 마음에 드는 여자아이 이외에게는 아무것도 말해줄 생각이 없다, 그렇게 말하더군.”
아하, 상황 이해했음. 이 사람들은 지금 하루라도 빨리 사건을 종결시켜서 국민감정이라든지 이런저런 압박을 피하고 싶은 거지. 옛날에도 벨기에에서는 마르크 뒤트루인지 뭔지 하는 아동 성폭행범과 관련해서 정치권까지 얽힌 스캔들이 크게 일어났었고,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걸 원치 않는 거야. 그래서 경찰은 몸이 달아 있는데 범인은 입을 다물고 있다 이거지. 그렇다고 진짜 순진한 애를 불러다가 희대의 살인마하고 대면시킬 수는 없는 노릇인데, 하필 이 아저씨가 예전 친구 논문을 읽다가 딱 좋은 사람을 발견했다는 얘기야. 지적이고 명철하며 살인범과 맞설 용기까지 겸비한, 그래, 내가 스스로 이렇게 말하니까 좀 이상하네. 가학적이고 무자비하고 동정심이 없어서 괴물과 맞닥뜨려도 충격을 안 받을 것 같은 애를 몰래 데려다가 범인에게 질문을 시키겠다는 게 경찰 상부의 입장인 거지. 이거 참 무리한 부탁이네. 교수가 질색할 만도 해.
“안 된다고 했잖아.”
자기 환자를 데려다가 비밀리에 살인마랑 대면시키겠다는데 찬성하면 교수 옷 벗어야지. 안 그래? 아니, 적어도 상식적으로는 그렇잖아.
“저 애한테 필요한 건 미친 범죄자가 아니라 친구들이야. 풍부한 감정 경험이라고. 범죄자의 심리를 읽어내는 건 수사관의 역할이지 저 애 역할이 아니잖아?”
“이게 유일한 방법이야, 스텔라! 어려 보이는 경관을 어린애로 가장해서 들여보내는 것도 실패했어. 형량 협상도 실패했어. 놈의 아내랑 자식들 얘기를 하면서 마음을 돌려보려고 했지만 그것도 실패했어. 그 놈은 정말로 어린애하고만 대화할 작정인 거야. 저 애가 유일한 희망이야.”
나 같은 애를 유일한 희망이라고까지 말하면 좀 부끄럽지만, 그걸 제외하면 이 다툼 자체에는 별로 관심이 가질 않네. 둘 다 나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잖아. 교수는 내가 그 친구라는 유학생 그룹하고 있을 때마다 얼마나 큰 지루함을 느끼는지 전혀 모르고 있고, 내가 미친 범죄자라는 것도 모른다고. 한편 저 역겨운 남자는 나를 도구로 써먹을 생각 가득이지. 진절머리가 나서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 뭣보다 내가 지금 관심을 가져야 할 건 전혀 다른 부분이야.
“그 사람한테 아내랑 자식이 있다고요?”
의외잖아, 안 그래? 범죄자가 이중생활을 하는 게 드문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의외인 건 의외인 거잖아?
“그래, 가족이 있다. 범행을 저지르던 시점부터 가지고 있던 장거리 트럭 운전기사라는 직업도 있고,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놈이 범인일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을 못 했다더군. 30년 내내 범죄 기록도 하나 없고 주변 애들을 건드렸다는 증거도 없다.”
그러니까 다시 정리하자면, 서른 명 넘는 여자애 손목을 잘라서 과다출혈로 죽을 때까지 강간하고 손을 기념품으로 보관해 둔 미친 소아성애자가 가족도 있고 직업도 있고 평범하게 잘 살고 있었어? 30년 동안이나 사고를 안 쳤어? 그게……, 어떻게 가능해? 그렇게나 많이 강간하고 살인한 사람이, 범행 세부사항 어디를 봐도 강박적이라고 느껴질 정도의 충동밖에 보이지 않는 사람이 갑자기 그 모든 충동을 참아낼 수가 있단 말이야? 광기어린 충동으로 움직이던 놈이 어떻게, 어떻게 30분도 아니고 30년 동안이나 참을 수가 있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믿을 수 없는 일이야.
난 벨기에에서 겨우 2년 살았고, 고작 그 2년 동안 몇 번이나 지루해 미칠 뻔했어. 그 전에도 마찬가지였어. 어릴 때부터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고 방화, 동물 학대, 기물 파손, 여동생 살해, 그 외 다수. 나는 이 끔찍한 권태를, 권태가 가져오는 뭐라도 해야겠다는 충동을 도저히 참아낼 수가 없었어. 그런데 저 사람은,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보다도 두 배는 더 긴 30년이라는 세월을 참아냈어. 가족을 만들었어. 같은 직업을 계속 유지했어. 애들을 건드리지도 않았어. 뭔가, 분명히 뭔가 방법이 있었을 거야. 항상 가슴 속에 도사리고 있다가 기회만 되면 꿈틀거리면서 뇌에 거역할 수 없는 명령을 내리는 쾌락, 기대감, 충동, 그 모든 것을 잠재우는 그 사람만의 비법이 있었던 게 분명해.
그리고 그건 내게도 필요한 거야.
약으로는 너무 부족해. 무기력해진다고 해서 범죄를 저지르지 못하는 건 아니야. 정말 지루함을 참을 수 없을 때는 약을 먹는다고 해도 상황이 전혀 나아지지 않아. 사람을 괴롭히고 고통을 주고 잡아 뜯고 깨물고 베고 가르고 토막을 내고 구워서 바비큐로 만들어버리고, 이것도 솔직히 질렸는데 더 나은 게 생각이 안 나서, 그래서 저런 것들이라도 하고 싶어져. 그럴 때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고작해야 자명종 시계를 망가뜨리는 것밖에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짜증나고, 또 지루하고, 그러면 또 화가 나고 충동이 생겨서, 이상 반복. 아까 교수가 말했지? 내가 전혀 나아진 게 없다고? 맞는 말이야. 이대로라면 나빠지면 나빠졌지 좋아질 것 같지가 않아. 그나마 가장 전문가에게 치료받기 위해서 그 애의 말을 따라 여기까지 왔는데, 여기서도 치료가 안 되면 나는 어디로 가야 해? 그 애한테 돌아갈 수 없게 되면 이 지루한 세상에 내가 있을 곳은 어디야? 그런데 마침 내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난 거야. 30년 동안이나 자신의 충동을 억제해 온 희대의 범죄자가, 어쩌면 내 치료를 가장 획기적으로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모르는 기적의 사나이가. 지금은 재미를 따질 때가 아니야. 지루하겠지만,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지만, 그래도 이건 다시없을 기회니까,
“할래요.”
교수님, 그런 얼굴로 보셔도 이미 제 마음은 굳어졌답니다. 이런 기회를 놓치는 건 범죄에요. 그리고 아저씨, 좀 티 나게 좋아해도 아무도 뭐라고 안 하고요, 할 말 더 있으니까 다 끝났다고 생각하지 말아줄래요?
“조건 몇 개를 달게요. 첫째, 이미 생각은 하고 계시겠지만 이 일은 관계자를 제외하면 철저히 비밀로 해 주세요. 이런 일로 알려지고 싶지 않거든요.”
경찰하고 엮이는 건 솔직히 좀 부담스럽기도 하고 말이지. 내가 지금까지 해온 일을 생각해보면 경찰하고 친한 것도 이상하잖아?
“그리고 둘째. 어차피 당신들 내 이름 제대로 발음 못 하는 거 아니까, 관련 문서에서든 회의실에서든 제 이름을 언급할 땐 대신 가명을 쓰세요.”
왜냐면 혹시라도 벨기에랑 한국에서 무슨 공동수사를 할 일이 있을 때, 내 이름이 한국 경찰의 귀에 들어가는 것만은 사양하고 싶거든. 사실 이건 변명이지만. 가명을 써 달라는 건 아주 상징적이고 개인적인 이유에서야. 이건 내 인생을 건 중요한 일이니까, 결혼식에서는 웨딩드레스를 입고 졸업식에서는 학사모를 쓰는 것처럼 중요한 일에는 그에 맞는 이름을 써야지. 오래 된 예복을 옷장에서 꺼내 입는 것처럼, 내가 쓸 이름은 이거야.
“소녀 A. 이렇게 부르도록 하세요.”
이 이름으로 불리는 건 두 번째네. 응, 두 번째치고는 나쁘지 않은 느낌이야.
 
그래서 나는 지금 ‘소녀 A’라는 그리운 이름을 걸치고 이 나라 최악의 아동성범죄자가 갇혀있는 곳으로 향하고 있어. 최악 대 최악인가, 한국의 자존심을 걸고 국위선양이라도 해야 하는 건가. 하지만 물론 내 목적은 그게 아니야. 30년처럼 느껴지는 몇 시간이 지나고 목적지에 도착, 온통 지루한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건물 안으로 향하는 동안 내 머릿속에는 단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어. ‘핸드픽커’ 레오폴드 브리에르라는 사람에게서 어떻게든 충동을 억누르는 방법을 얻어내는 것. 아무리 지루하더라도 해야 하는 일.
“이쪽 방이다.”
딱 봐도 그쪽 방인 거 같더라. 다들 힐끗힐끗 쳐다보잖아.
“마음의 준비는?”
글쎄, 그런 게 필요 없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나를 선택한 거 아니었나? 머리의 준비라면 뭐 확실히 되어있지만. 레오폴드 브리에르의 알려진 일생, 한적한 시골의 엄격하고 독실한 기독교인 가정에서 태어나서, 30대에 트럭 운전기사로 취직, 네에 네에. 이것만 보면 어쩜 이렇게 지루한지. 내게 있어 중요한 건 아무래도 마음의 준비가 아니라, 너무 지루해져서 맛이 가기 전에 빨리 목표를 달성하고 나오는 게 아닐까 싶네.
“할 일이 뭔지는 알고 있겠지? 아이들의 행방, 죽였다면 시신의 위치. 이걸 알아내는 일은 너에게 달렸다.”
아, 그것도 있었지. 지루하겠지만 뭐 그것도 일단 물어볼까. 그 사람이 여자 취향은 좀 깐깐해도, 자기 맘에 드는 여자애만 보면 헤롱대면서 있는 거 없는 거 다 말해주는 부류일지도 모르잖아. 그렇다면 정말 덜 지루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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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이 작품에 등장하는 어떠한 인물과도 사상을 같이하지 않음을 명시하는 바입니다. 진짜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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