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깔의 무게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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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1학년의 마지막 수업인 목요일 전공을 끝으로 바로 공항으로 직행해 홍콩에서 도망쳤다. 탈출했다는 표현도 어울릴지 모른다. 꼭 대학교 1학년까지 해서, 나는 10년 동안 한국에 돌아간 적이 없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셈이었지만, 그렇게 치기엔 10년의 단위가 굉장히 크게 다가왔다. 정신차려보니 나는 21살이라는 나이가 되었고, 10년이 순식간에 사라진 것 같았다. 그 느낌은 마치, 그 긴 시간을 이 땅, “중국이라는 땅에 저당잡힌 것 같은, 무척이나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어울리지도 않는 이 땅에 심어져버린 것이 나를 이렇게 만든 것처럼 여겨졌다. 계속 이렇게 있다간 한국에 돌아가지 못하게 될지도 몰라. 그래서 나는 무작정 한국으로 도망쳤다.

   한국에 온 뒤 며칠 동안 나는 어렸을 적의 기억이 남아 있는 서울 자락을 돌아다녔다. 추억에 잠겨 길거리를 걷다가, 오래 전 연락이 끊겼던 친구들이 떠올랐다. 인터넷을 통해 간간이 남은 연락처로 알음알음 연결됐고, 만날 약속까지 잡았다. 하지만 10년은 단지 단위로만 남아 있지 않았다. 꼬마 시절 절친했던 우리들은 예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이제는 옅어진 초등학교 시절의 관계만이 간신히 우리를 연결해놓았다. 그 추억마저도 다 떨어지자 아예 남과 다를 바 없는 어색한 모습만 남아 있었다.

   그러다가 친구들은 내가 홍콩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다는 말에 홍콩에 대해 말해달라고 했다. 그런 곳에서 유학하는 게 어떤 기분이냐며 물었다. 홍콩이라는 이름엔 마력이라도 깃들어 있는 듯했다. 화려한 건물들이 번화가를 가득 채운, 어딜 가나 네온사인이 번쩍거리는 관광도시. 홍콩에 살고 있다는 말을 하면 다들 먼저 부러움에 찬 눈빛을 보냈다. 홍콩이라는 이름 위에 쓰인 이미지가 모든 것을 덧칠했다. 그러니까 그것은 눈길을 사로잡는 커다란 포장지였다. 그 안에 무엇이 들었든 그건 사람들에게 별로 상관이 없었다.

   옛 친구들과 헤어진 뒤 나는 밤거리를 혼자 걸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거리였지만 골목골목을 돌아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번화가에서 멀어지고 주택가에 들어섰다. 집들에서 새어나오는 길가를 밝히는 불빛. 낯익은 냄새가 어딘지 익숙했다. 그래서 실망스러웠다. 도망치듯 한국으로 돌아왔으면서도 나는 묘한 기분이었다. 당혹감이 먼저 자리를 잡고 있어 다른 감정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한국에 오게 되면, 아예 새로 태어나기라도 할 거라고 착각했던 것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느낌은 한국이나 홍콩이나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 뒤 며칠 더 바깥에서 우물거리다가, 집으로 들어와서는 밖으로 거의 나가지 않았다. 나는 한국에 있는 동안 외삼촌네 집에서 얹혀살았다. 외삼촌은 못마땅한 얼굴로 그럴 거면 왜 한국에 왔느냐고 타박했다.

   한국에 온 순간부터 이방인이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나는 한국에 와서 무엇을 해야 할지 아무것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냥 한국에 오고 싶었을 뿐이고, 홍콩에서 도망치고 싶었을 뿐이지 그 뒤에 무엇을 한다는 것에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단지 한국에 온다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었을 뿐이었지 목표를 가지고 온 게 아니었다.

   리우와 헤어진 뒤엔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러다보면 잡생각이 늘기 일쑤였고, 그 생각들은 대부분 자학적인 내용으로 이어졌다. 처음엔 리우와 사귄 것이 너무 성급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했고, 그 다음엔 H대에 온 것, 홍콩으로 진학한 것, 그리고 종국엔, 중국에 남아 있던 것을 후회했다. 해답을 찾아야 한다면 아마도, 거기서부터 찾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아예 잘못된 생각이었다는 것을 깨닫자 나는 어찌해야 할지를 몰랐다. 애초에 그것 외에는 다른 해답이 없다고 스스로 단정지었기 때문이었다. 막다른 길에 내몰렸는데, 되돌아갈 방법도 몰랐다.

   그렇게 계속 시간이나 죽이다 홍콩으로 돌아갈 날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하루 종일 수천 통씩 쌓인 메일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메일들 중에서 우연히 L, 이 보낸 메일을 봤다. 자칫 스팸메일로 지워버릴 뻔한 메일이었다.

   나는 당장 메일을 읽었다. 친구를 통해서 한국에 온 걸 들었다고, 언제 한번 만나자며 핸드폰 번호를 남겨놓았다. 한국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온 메일이었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전화를 걸려다가, 결국 누르지 못하고 번호를 화면에서 지웠다. 그녀를 만나면, 나는 홍콩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 같았다. 그곳에 남아있는 것은 지긋지긋했지만 그렇다고 H대를 자퇴할 용기도 없었다. 비겁한 말이었지만 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스스로 더 잘 알았다. 그게 현실이었다. 나는 홍콩에 돌아가기 전까지 결국 번호를 누를 수 없었다. 한번 도망친 사람은, 계속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발치에 있던 비가 내리는 바깥으로 돌을 걷어찼다. 한참을 굴러가던 돌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그곳에 있을 것이다. 나는 눈에 보이지 않게 돈 그 돌을 노려봤다. 내게 현실이란 항상 놓기 어려운 밧줄이었다. 내게 있어서 더 중요했던 것은, 겨우 손에 쥔 H대 학생이라는 소속감 한 마디뿐이었던 것인지.

   그때 내 옆에서 같이 비를 피하던 여자가 한참 나를 쳐다보았다. 그 시선을 느끼고 돌아봤지만 바로 정면 네온사인 빛이 후광처럼 빛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우스꽝스러운 표현이었지만, 그건 마치 싸구려 빛을 내뿜는 천사처럼 보였다. 그녀는 우산도 없이 빗속으로 걸어갔다. 그러더니 돌을 주워 내게 다가왔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자가 광둥어로 말했다. 이거, 당신 거죠? 여자는 좀 더 길게 말했으나, 광둥어를 못하는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부분은 단지 그 한 마디였다. 나는 계속 이어지는 여자의 말을 끊었다. 영어로 해주실래요? 이번엔 여자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보통어도 괜찮아요. 중국어로 묻자 그제야 홍콩 억양이 섞인 중국어로 말했다. 여기요. 여자는 돌을 건네주었다. 손에서는 이상한 냄새가 났다. 페인트 냄새였다.

   여자가 내 손바닥에 놓여진 돌멩이와 여자를 보며 궁금증이 먼저 일었다. 나는 여자의 기행에 묻고 싶은 게 수없이 많았다. 그런데도 내가 여자에게 물은 말이란 겨우 이런 것이었다.

   이건, 뭐죠?

   여자는 당연한 걸 묻는다는 투로 대답했다.

   돌멩이죠.

   침묵이 흐른다. 나는 다시 물었다.

   내 말은, 이걸 왜 저한테 갖다 줬느냐는 말입니다.

   여자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당신이 걷어찼으니까요.

   나는 잠시 돌멩이를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내가 걷어찼다고 이 돌멩이는 이제 제 것이 되는 겁니까? 여자가 대답했다. 당신이 차지 않았다면 돌멩이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을 거예요. 나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취기가 확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나는 비틀거리는 시선 속에서 여자의 얼굴이 마치 그녀의 목소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당신은 왜 저한테 이 돌멩이를 주워다 줬나요?

   여자는 씨익 웃었다.

   그게 제 일이니까요. 혹시 꿈, 사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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