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깔의 무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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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은 리우와 사귄 날부터 거의 1년이 되어 갈 즈음이었다. 나는 그날 새벽 잠에서 깼다. 살짝 뜬 눈으로 본 천장은 네온사인의 화려한 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직 알람도 울리지 않았다. 두어 번 눈을 깜빡였다. 나는 실눈으로 천장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인공적으로 반짝이는 네온사인 불빛에 눈꺼풀로 만들어진 부자연스러운 어둑함. 둘은 어설프게 섞여 이상한 색깔을 만들었다. 밝게 빛나는 캄캄함. 눈을 감을 때만 보이는 색깔이었다.

   다시 잠에 들려고 했지만 한번 깨어나자 잠이 오지 않았다. 반쯤 감긴 눈으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내 옆에 누군가 누워 있었다. 나는 깜짝 놀라 침대에서 내려왔다. 여자였다.

   어렴풋이 보이는 방안의 윤곽, 그리고 방에서 풍기는 익숙하지 않은 냄새. 내 자취방이 아니었다. 여자도 잠에서 깼는지 스르륵 몸을 일으켰다. 여자는 일어나자마자 이렇게 물었다. , 다 잤어요? 이명처럼 울리는 여자의 홍콩 억양이 섞인 보통화(普通話, 중국 표준어). 머리가 지끈거렸다. 지저분한 숙취가 남아 있었다.

   맙소사, 이게 무슨 일인지. 당혹감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꿈은 꿨어요? 나는 여자의 얼굴을 쳐다봤지만 창밖 불빛이 후광처럼 비춰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 이라니 도대체 무슨 소리죠? 당황해서인지 중국어 발음이 우스꽝스러웠다. 여자는 어제 꿈값 치르셨잖아요. 기억 안 나세요? 하고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꼬리를 올렸다. 당황스러웠다. 그냥 잠만 잤다고 생각하는 건 역시 순진한 결론일 것이다. 꿈값, 이면 무슨 매춘비용 같은 것일까.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여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젯밤 그 꿈은 진짜 좋은 꿈이었거든요. 그런데 새벽에 꿈 팔아본 건 처음인데, 아침 안 먹어서 괜찮으려나.

   나는 잠시 여자가 무슨 말을 한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여자는 슬쩍 내 얼굴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 어머, 진짜 기억 못하시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내 꿈 돌려내요. 나는 한참 멍하게 서 있다가, 그제야 그녀를 어디서 본 적이 있다는 걸 떠올렸다. 멍졔. 바보같은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어제 우리 아무 일도 없었던 건가요? 여자가 대답했다. 그럴 리가요. 전 꿈을 팔았고, 당신이 그 꿈을 꾸는 걸 봤어요.

 

   그날은 개강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날이었는데, 며칠 동안 비가 세차게 내리는 게 심상치 않더니 곧 태풍이 온다고 했다. 9호 태풍경보였을 것이다. 9호 경보면 모든 대중교통이 운행 중단되고, 학교와 상점, 공관서까지 모조리 문을 닫는다. 태풍이 흘러갈 때까지 꼼짝없이 감금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중학생이었을 때 홍콩에 놀러왔다가 태풍에 발이 묶였던 기억이 났다. 태풍이 지나가고 하룻밤 머물었던 친구네 집에서 나오자 바깥은 조용했다. 하지만 전날까지 멀쩡했던 길거리에는 부서진 보도블럭과 우그러진 가로등이 나뒹굴었다. 공원에 서 있던 커다란 나무는 도끼에 찍힌 것처럼 반쯤 벌어져 속살을 내보였다. 그때가 7호 태풍경보였던가.

   대학 강의 역시 마찬가지여서, 며칠 동안 휴강하게 되자 갑자기 동창 모임이 급조되었다. 나는 억지로 불려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2학년이 되자 한국 남학생은 대부분 귀국해 입대했고, 2학년에 남은 한국 남자라곤 나를 포함한 두셋 밖에 없었다. 그대로 강제 참석이었다.

   동창 모임이었기에 당연히 리우도 와 있었다. 그것도 내 앞자리였다. 리우가 인사했다. 나도 따라 잘 지냈냐고 물었다. 인사가 끝나자 분위기는 어색해졌다. 기회를 노려 도망칠 궁리만 했지만 오랜만에 모인 자리여서 다들 쉽게 자리를 뜨지 않았다. 어색한 분위기에 죽을 것만 같았다. 리우는 옆자리에 앉은 친구와 수다를 떨었고, 나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술은 가끔 분위기에 맞춰서 마셨다.

   금방 도망간다는 게 그러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남아 있어야 했다. 술자리에 술병이 가득 쌓이자 분위기에만 맞춰서 마셨는데도 머리가 빙빙 돌았다. 다들 술에 취하자 슬슬 여러 가십거리들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남자가 극도로 적은 술자리임에도, 아니 남자들이 없는 자리라서 그런지 여자들은 더욱 거침이 없었다. 누가 누구랑 잠자리를 가졌다든지, 같은 성적 발언등도 예사로 들렸다. 그때 누군가가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 학교 근처에 그런 소문 있던데. 어떤 여자가 꿈을 판다는 소문. ? 웬 꿈? 나도 잘 몰라, 그냥 밤새 꾸는 꿈 있잖아. 동양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몇몇 백인 동창들은 그 말에 신기하단 반응이었다. 꿈을 왜 사는 건데? 그냥 심심풀이로 하는 거지 뭐. 신기한 미신이네.

   다들 취기가 한껏 오른 상태였기에 별 것 아닌 얘기에도 다들 빵빵 웃음이 터졌다. 나는 웃지 못했다. 리우도 얼굴이 잔뜩 굳었다. 멍졔에 대한 이야기. H대에 다니는 녀석이면 다들 우리가 사귀었다는 것을 알 것이었고, 그리고…….

   결국 누가 그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동창들은 짓궂은 질문들을 던져댔다. 전혀 몰랐다느니, 왜 헤어졌느냐느니, 하는 얘기들. 그냥 부담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L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다들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라고 화기애애해지더니 그녀가 어떻게 되었냐고 내게 묻기 시작했다. 여전히 L을 좋아하느냐고 노골적으로 묻기까지 했다. 리우가 속이 안 좋다며 갑자기 술자리를 떴다. 나도 리우를 뒤따라 일어나 도망치듯 빠져나갔다.

   술집을 빠져나왔지만 리우는 벌써 보이지 않았다. 바깥에는 비가 내렸다. 옅은 소나기였다. 나는 가방을 뒤졌다. 우산이 없었다. 술자리에 놓고 온 듯했다. 하지만 다시 올라가기는 싫었다. 어쩌나 고민하고 있는데, 빗줄기 떨어지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스콜이었다. 그냥 있으면 한참 동안 묶여 있을 것 같았다. 잠시 고민하다 무작정 거리로 뛰쳐나갔다.

   술집에서 한참 떨어진 거리를 내달렸다. 스콜은 쉽게 그치지 않았다. 벌써부터 태풍이 몰려온 것 같았다. 달리는 와중에 골목길이 보였다. 그곳에 들어가면 비는 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안에는 이미 비를 피하는 사람이 몇 명 있었다. 나는 물기를 털어내며 바깥을 쳐다보았다. 비 내리는 길거리. 홍콩에 살면서 가장 익숙한 풍경이었다. 끝날 것 같지 않은 여름에 시도 때도 없이 내리는 폭우. 진절머리가 날 정도였다. 내게 홍콩은 그 이름처럼, 사람들이 흔히 갖고 있는 이미지처럼 아름다운 곳이 아니었다. 내게 있어서 홍콩은 그야말로 지긋지긋한 비 그 자체였다. 몸에 끈덕지게 달라붙는 끈적함이었다. 매일 아침 침대 시트에서 나는 젖은 냄새가 바로 홍콩이었다.

   영원히 반짝일 것만 같던 홍콩의 밤도 90년대가 끝나면서부터 가라앉기 시작했다. 더 이상 홍콩은 문화의 중심지가 아니었고, 예전의 위명에 비하면 몰락한 도시라고 불러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여전히 건재한 것처럼 보여도,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일종의 위화감. 나는 그 위화감의 정체를 안다. 내게 이곳은 철저히 잘못된 땅이었다. 환상을 모두 털어내 버린 뒤에 남은 그곳은 일종의 유배지였다. 지워지지 않는 지독한 상실감이 공기의 주성분처럼 남는 곳이었다.

   L. 얼굴보단 목소리로 먼저 기억되는 여자아이였다. 햇볕에 잘 말린 이불이 품고 있는 온기가 스며든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 너무나도 좋았다. 나는 그녀와 함께 하기 위해서라면 뭐든 했다. 일부러 따라가지도 못할 수업을 같이 듣고, 배우지도 않은 스페인어를 중급과정까지 들었다. 그녀는 마치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모두 가진 듯한 사람이었다. 부모의 요구대로 H대에 합격하겠다는 말을 오늘 점심을 먹겠다는 식으로 말하고, 그렇게 쉽게 이뤘다. 최종시험을 보기도 전에 대학 여러 군데에서 언컨(Unconditional offer, 줄여서 언컨. 기대 이상의 학업을 보여준 학생에게 일정한 성적을 요구하지 않고 조건 없이 입학을 허가하는 제도)으로 입학 제의까지 받았고, 거기엔 H대도 있었다. 나는 그녀와 같은 곳에 가고 싶었고, 스스로도 놀랄 만큼 노력해 같은 대학에 합격했다. 내가 H대에 합격하게 된 것은 순전히 그녀 때문이었다.

   한국으로 갈 거야. L이 말했다. 다들 그녀의 말에 놀랐다. 아무도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L처럼 되고 싶었으나, L이 아니었다. 나는 손에 넣을 걸 손쉽게 버릴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가진 것이 너무 적었기에 더욱 그랬다. 결국 그녀는 졸업한 뒤 한국으로 훌쩍 떠나버렸고, 나는 홍콩으로 왔다. 그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내 감각을 속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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