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방 안 침대에 누워서 홀로 천장을 바라보던게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유일하게 잘할 수 있는 일은 뜨개질을 하는 것뿐. 닫혀진 문 사이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맛없는 영국식 런치와 털실들 뿐이다. 모로코인의 집처럼 카펫들로 수놓은 내 방의 벽은 영국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범주에 벗어났을 것이라 장담한다. 어릴 적에 선물 받았던 인형들은 곰팡이가 슬어있는 채 아무렇게나 내동댕이쳐져있다. 여자 아이의 방이라고 하기보단 그저 오래된 쓰레기를 방치해놓는 창고나 다름 없었다.
희미하긴 했지만 아주 어릴 적 기억에서, 나는 줄곧 고양이에게 짜다 만 털실을 던져주면서 가지고 노는걸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워했던 것 같다. 사라져버린 것은 언제였는지 잘 모르겠지만. 가문에서 키울 수 없다며 쫓아내버렸던 것 까지는 기억하고 있다. 집이 없는 새끼 들고양이였으니까. 몰래 들였다가 허락도 받지 못하고 금방 쫓겨나고 말았지. 불쌍한 아기 고양이.
"있잖아. 왜 다들 떠나는거야?"
공허한 질문은 빈 방 사이를 맴돌았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밖에선 비가 내린다. 런던의 날씨라는건 언제나 쥐가 들끓는 시궁창같았기에 맑은 날씨를 보는 것이 오히려 더 어려웠다. 아니, 오히려 이편이 좋을지도 모른다. 햇살이 비춰지는 바깥풍경이란 내게 있어서, 아무 느낌없이 보는 미술관의 흔한 수채화에 지나지 않았다. 실제로 존재는 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다가오지는 않는 그런 심상말이다.
어릴 적에는 줄곧 동생들과 함께 놀면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남자 아이들이었지만 나와 같이 인형놀이를 하는 것을 좋아했었다는 것 정도만 기억할뿐이다. 그 이외엔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잊혀진 존재들이다.
"엄마..."
다정하고 예쁜 사람이었다. 하지만, 사진첩에 남아있는 얼굴을 다시 보게된다면 또 다시 발작을 일으킬게 뻔하다. 그리고, 또 다시 잠가놓은 문을 소방도끼로 부수고 어른들이 들이닥치겠지! 내 안위를 걱정해서 들어오는게 아니라 그저 층간소음의 피해자가 되지 않으려 내 입에 재갈을 물려두고서 방치해둘 것이다. 이 가문의 사람들이란건 다 그런 인간들뿐이다.
아침이 오는 것을 두려워해본 사람이라면 모두들 그럴 것이다. 내일은 더 이상 눈을 뜨지 않기를. 이대로 영원한 잠에 빠지기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자살을 할 수는 없었다. 우리 가문은 엄격한 카톨릭교도로 엄마 또한 독실한 신도였었다. 우리 모두의 아버지이신 그 분이 주신 선물을 가벼히 다루는 것은 씻을 수 없는 죄악이라고. 가문에서는 좀 더 엄격한 방식으로 주입하듯이 내게 이야기했지만, 어머니는 다르게 이야기하셨다. 사랑받았기 때문에 이 모습 그대로 지어진 것이다. 미사때 어머니는 내게 그런 이야기를 해줬었다. 즉,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된다면 천국에 계시는 어머니와는 두 번 다시 재회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정말 잔인한 이야기다. 곧바로 만날 수 있을 선택권마저도 박탈해버리다니.
"정말로 그래 엄마? 거짓말이잖아."
방 안에 거울을 두지 않은지 오래되었다. 분명, 난 내 모습을 스스로 본다면 또 다시 발작을 일으킬거다. 하지만 알 수는 있다. 태어날때부터 선천적으로 알비노를 가지고 있는 내가, 바깥과 동화될 수 없는 것은 지극히도 당연한 현실이란걸.
엄마가 그렇게 사라지고 난 후엔, 가문은 언제나 노골적으로 날 멀리하기 시작했다. 예쁜 옷이 있으면 다 친척 아이들의 몫이었고 나는 그보다 덜한 것들을 받으면서, 식사 시간이 되면 둘러앉아 식사도 하지 못했고 떨어져있는 방에 홀로 앉아 울면서 삼킬 뿐이었으니까! 만들어지다 만 괴물, 가문이 받은 저주의 집합체. 악마의 자식. 친척들이 나를 조롱할때 쓰는 말들이다. 얼굴도 잘 비추지 않고 대화도 하지 않는 아버지는 가문을 향해 어떠한 변호도 하지 않아!
"안돼, 안돼."
발작을 일으켜서 또 그들을 이 방으로 불러낼 순 없어. 그러느니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는게 나을거다. 그냥, 이대로 눈을 감고 뜨지 않기만을 매일 기도하면서 살아갈 수 밖에 없어. 우르릉 쾅쾅. 천둥번개 소리가 요란하다. 오늘은 날씨가 특히 더 극성스럽다. 이미 난, 여러 해 동안을 빗소리를 자장가로 삼아왔다. 거기에 무언가 더 붙여진다고 달라질 것은 없어. 내 목숨이 끊어지는 전조라면 좋을텐데. 어차피 난 오래 살 수 없는 몸이다. 엄마의 몸에 붙은 육체의 저주는, 그대로 나에게 전승되었으니까. 의사 말로는 길어야 20살을 사는게 고작일거라고 했어. 그렇다면 틀림없다. 이제 곧, 엄마 곁으로 갈 수 있어.
토르가 내려친 망치에서 뻗어내린 한 줄기 불꽃기둥. 어릴 적에는 신화를 좋아했지만, 인간들이랑 별 다를 바 없이 하찮은 모습을 보였던 신들의 모습에 지금은 넌더리가 날 정도다. 그래, 그 망치로 나를 내리쳐 목숨을 끊어줘. 나는 진심으로 그런 부탁을 신화 속 허구의 존재에게 했다. 그리고, 원하는대로 번개가 내 집의 창문을 향해 내리쳐오는 것을 보았다.
하얀 어둠이 내려앉았다. 보통 어둠이라고 하면 아무 것도 없는 칠흑의 상태를 말하며 육이 죽어서 땅에 묻히는 상태를 이야기하곤 한다. 하지만, 영으로써 그것을 목격하는 일은 없었다. 아마, 친척들이라면 날 장사지낼 필요도 없이 곧바로 화장해서 아무 곳에나 뿌리는 걸로 마무리를 지을지도 모른다. 이런 기대따윈 이제 상관없겠지.
아주 황당한 일이긴 하지만, 내 눈앞엔 어떤 소재의 옷감으로 만들었을지 전혀 알 수 없는 옷을 입은 같은 나이 또래의 남자아이만이 보였다. 아니, 자세히 보니 알 수는 있을 것 같았다. 각종 식물을 엮어서 만들어낸 형태의 난해하고 조잡한 모양. 마감을 한 부분 마저도 엉터리라 조금만 풀어헤쳐도 금방 누더기가 될 것 처럼 보였다. 그런 형편없는 옷차림을 한 것과는 별개로 갈색머리에 녹안을 한 소년은 이쪽의 심정따윈 아랑곳 않는듯 연신 생글생글 웃으며 주위를 뱅뱅 날아다니는 것이다.
"있잖아. 난 역시 죽은 거 맞지?"
설마 영어를 못알아듣는다거나 그런 건 아니길 바라겠지만. 소년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듯 양 손을 어깨까지 올리는 건방지고 능청스러운 제스처를 취했다. 설마, 프랑스어라던지 아니면 스페인어로 이야기라도 해야한다는거야? 교양과목으로 프랑스어는 조금 배운 적이 있지만, 그 외에는 전혀 모른다. 같은 질문을 이번엔 프랑스어로 해서 말해보았다. 그러자 소년이 대답했다. 물론, 영어로.
"네 말이 무슨 뜻인지 전혀 모르겠는걸. 그리고 난 그쪽 언어는 전혀 모르겠어. 넌 역시 다른곳에서 온거야?"
아무렇지 않은듯 계속 웃음기 가득한 그 얼굴이 짜증날 정도였다. 그럴거였으면 처음부터 영어로 대답하던가. 사람을 놀리는 것도 아니고 뭐하는거야?
"집에 번개가 내리쳤고, 난 거기에 휘말려서 죽은거야. 그리고 아까부터 계속 내 주변에서 얼쩡거리는데 너 도대체 정체가 뭐니?"
사신이라던가 천사라던가 그런 존재로 보기에는 지나치게 경박해보이는 옷차림에 태도. 어쩌면, 처음부터 하늘나라라는 곳은 이런 머저리들로만 이루어진 공간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자니, 막상 죽은 몸이라곤 해도 걱정이 밀려들어왔다. 어쩌면, 천국이란 곳은 하루종일 사운드 오브 뮤직을 틀어놓고 거기에 장단맞춰 하하호호 웃으면서 생각없이 노는 멍청이들의 세상은 아닐까 하는 불안감까지 밀려들기 시작했다. 이 소년을 보고나니 그런 추측들이 더 살을 붙이고 구체화되는 것 같아.
"내 이름은 피터팬!"
"이름을 물은게 아니야!"
피터팬이라는 이름의 소년은 내 대답에 개의치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하얗던 어둠은 사라지고 거기에 홀로 있었던 소년은 갑자기 내 몸을 두 손으로 들쳐안았다. 소년은 위를 보라는듯 눈짓으로 가리키며 자기 할 말만 앞세웠다. 별자리들이 서로 공전하면서 겹쳐지는듯한 현상. 흰색의 어둠은 사라졌고 형형색색의 별빛들이 떠올랐다가 이내에 점멸하면서 퍼져나갔다. 그리고, 우리 두 사람은 그렇게 만들어진 우주공간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꽉 잡아. 이제 곧 출발할거라구."
"뭐하는거야?! 이거 놔!"
"있잖아. 네가 정말로 번개를 맞은거라면 어째서 네 몸은 전혀 타지 않고 멀쩡한거니? 아, 네 머리가 하얗게 새버린 것이 혹시... 벼락을 맞아서 그렇게 되버린거야?"
"장난쳐?!"
똑같다. 그 빌어먹을 친척들이 조롱하는 말과 똑같아. 이런 것들을 거기에서까지 만나야하다니. 다시 내 방으로 돌아가는 편이 차라리 더 나을 것 같아. 진심으로 그런 말을 하는 멍청이가 세상에 어디있어?
"어? 아니야? 미안, 오해하고 있었어. 놀리려고 한 말은 아니야. 나랑 같이 살고있는 친구들중에도 비슷한 애들이 있거든. 너처럼 예뻐."
"예쁘다고? 난 살면서 아무한테도 그런 말 들어본 적 한 번도 없어. 그저 장단이나 맞춰주고 싶어서 하는 말이라면 집어치워. 이 머저리가!"
사실 내겐 고소공포증이 있었다. 가장 높은 층의 다락방을 차지하고 있었으면서도 정작 창밖으로는 고개조차 내밀지 못할 정도로 심하게 앓고 있었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어디 하나 정상인 부분이 하나도 없는 나인데. 예쁘다는 칭찬따위 전혀 어울리지 않잖아.
"거짓말 아닌데. 봐, 여기 참 예쁘지 않아? 맑고 투명한 모습의 우주라구. 우리들은 여기에서 태어나서 나온거야. 그리고 살아가고 있다구."
처음에는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허공때문에 숨이 막힐 것 같았지만, 만난 지 얼마 안된 남자아이의 품에서 바라본 우주는. 내가 지금까지 상상해왔던 수채화의 풍경들을 아득하게 넘어서 있었다. 그래, 이건 미술관에서 그냥 스쳐지나가듯이 보는 그림같은 것이 아니었다. 내가 살고 있던 세상을 넘어서 만난 진짜 우주다. 지금까지 한 번도 관측한 적 없는 수 많은 은하수들이 마치 정원의 화초들처럼 드넓은 우주에 수놓아져 있었다. 두려움마저 잊을 정도의 압도적인 광경이 이곳에 있었어.
"있잖아. 난 죽은거야?"
"아까부터 몇 번을 물어보는거야. 죽는다는게 대체 뭔데?"
"뭐냐니.. 그런 대답이 어디있어?"
"네가 먼곳에서 우주를 불렀고, 나는 거기에 응해서 너를 데려온거라구."
무슨 이야기인지 전혀 모르겠어. 하지만 내가 죽은게 아니라면, 적어도 가는 곳이 천국이나 지옥같은 개념의 장소는 아니라는 이야기가 된다. 나는, 내가 죽게되면 신곡에서 보았던 것처럼 베르길리우스같은 안내자가 단테를 이끄는 것처럼 사후세계를 둘러보면서 갈거라고 생각했는데. 심지어는 죽어서 가는 곳조차 아니라고 말한다니. 어디까지 믿어야할지 알 수가 없다.
"요정들의 나라. 네버랜드. 어떤 사람들은 알브헤임이라고도 부르는 것 같더라구. 요정 여왕 티타니아와 요정왕 오베론이 세계수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낙원이 이곳에 있어."
"어째서 나를 여기에 데려온거야?"
"글쎄, 네가 원했기 때문이겠지. 원하지 않는 자에게는 열리지 않는 세계야 이곳은. 가장 간절하게 오길 원하는 사람만이 입장할 자격이 주어져."
소년은 이어서 말했다. 이제 곧 요정들의 나라에 진입한다고. 낙원이 그곳에 있다고. 하지만, 언제나 어두운 다락방에서 몇 해를 넘겨오던 나에게 그 단어만큼이나 추상적으로 들리는 것은 없었다. 그렇지만, 어째서인지 모르게 지금까지와는 다른 기대 같은 것이 마음 속에서 솟아나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어쩌면, 정말로 어쩌면.
"우리 엄마도 이곳에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