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생과 바둑해설에 관하여
사실 미생 연재마다 나오는 바둑 기보와 내용을 엮으려는 분들이 제법 많은데... 아무 관련 없습니다. 특히 초반의 경우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바둑 그 자체와 미생은 강한 연결고리가 있는 건 사실입니다. 주인공의 삶에서 바둑은 떼 놓기에는 이미 너무나도 가깝지요. 그리고 주인공 장그래의 행보는 반상에서 느꼈던 걸 현실에서 복기한다고 보면 별로 틀리지 않습니다. 즉, 자신의 바둑과 자신의 바둑을 만들어준 전체적인 가르침에 따라 움직이는 걸로 볼 여지는 있다는 거지요.
그러나 매화 나오는 1수마다 의미를 두는건 솔직히 의미가 없습니다. 특히 초반은 정말로 의미가 없습니다. 포석 하나 두는데 1분은 고사하고 10초도 채 안 걸리는 건 물론, 기사들끼리 "상대방이 포석을 어떻게 둘지" 이미 1수 정도는 내다보고 있는 상황인지라 중계를 보고 있으면 "어? 저거 백돌이 아직 다 두지 않았는데 왜 흑돌이 자리를 잡으려 하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반상에서 "진짜 기사들의 손이 부딪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은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진짜로 손이 부딪칠 정도로 포석은 미리 준비해 온 전략으로 그냥 막 움직입니다.
이건 이미 대국마다 전략이 어느 정도 세워진 상태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거지요. 거의 초반의 50 미만의 수는 포석 그 자체이거나 포석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장기로 친다면 마상의 배치를 잡는 정도랄까요? 프로장기에서 마상마상, 마상상마, 상마마상, 상마상마 중 하나를 고르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됩니다. 장기에서 포진을 하는 건 수를 움직이기 전에 이루어지지만 바둑은 흑돌의 수를 시작으로 이루어진다고 보면 얼추 맞습니다. 따라서 포석 전체를 가지고 크게 보면 의미가 있을지 모르나 한수 한수를 "그렇게 거창하게 설명하며 인생과 엮을 정도"의 수냐고 묻는다면 글쎄요... 과거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등 일간신문사에서는 바둑대회를 후원하는 경우가 많아 자신들이 후원하는 대회나 KBS 바둑왕전 급의 기전은 지면을 일부 할애하여 바둑계의 주요 경기들의 기보를 소개하곤 했습니다. 이런 경우엔 대부분 150수를 전후하여 소개하는 경우가 많았고, 혹은 제법 대단한 난전과 속기가 이루어진 경우엔 120수를 내외한 시점을 먼저 알려주곤 했습니다.(물론 90년대 당시의 속기라는 개념이 지금과 비교하면 준속기에 가깝습니다) 세계바둑기전이 한국에 안정적으로 정착하기 이전에는 보통 3시간짜리 기전이 많았을 정도라서 300수를 넘는 경우도 심심찮게 있었습니다.
어쨌든 이유는 그 시점이 대국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고, 또 승패를 가르는 분수령이 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삼국지로 치면 관도대전이나 적벽대전 정도로 볼 수 있지요. 허나 귀퉁이 하나 둘 세력이 생겨나는, 초반 20수도 채 안 되는 포석중인 상황을 뭘 그리 장황하게 표현할 필요가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삼국지로 치면 "영제가 태어났다"라든가 "건석이 내시가 되었다" 정도밖에 안 됩니다. 물론 이 사실이 후한의 멸망과 관련이 있긴 하지만 황건적의 출몰, 조조와 원소의 대립, 유비와 손권의 연합, 관우의 죽음과 오의 확장 등과 비교했을 때 도무지 임팩트가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오히려 제3회 삼성화재배의 경우 많은 사람들이 보기엔 130수를 내외해서 마샤오춘이 흔들렸고, 170수를 둔 시점에선 누가봐도 마샤오춘이 "왜인지는 모르지만 확실히 흔들리고 있다"고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몇몇 바둑뉴스에서는 이 시점을 중심으로 대국을 분석하는 경우가 많았지요. 삼국지로 치면 "관도대전에서 조조가 오소를 치는데 실패했거나 허유가 조조에게 안 넘어갔다면?"을 두고 논하거나 "만약 조조가 주유의 고육지책을 간파했더라면?"같은 격렬한 토론이 일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 120~130수 사이는 관도대전에 비할 만한 것이었고, 160~170수는 적벽대전에 비할 만한 극적인 장면이기 때문이지요. 헌데 "영제가 안 태어났더라면?", "건석이 내시가 안 되었더라면?"이 과연 이야기거리가 될 수 있을지는... 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흥미있어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저기 바둑 사이트가서 당시의 뉴스와 기보를 살펴보면 겨우 20수 남짓한 시점이 토론거리가 되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는 걸 쉽게 깨달을 수 있을 겁니다. 아무도 그런 댓글처럼 중요한 시점으로 여기질 않거든요.
아시는 분은 알겠지만 작가 윤태호 선생은 바둑에 대한 조예가 그리 깊지 않습니다. 그래서 무슨 무협소설에 나오는 천골지체마냥 극초반 포석 한 수를 보고 "아! 이게 바로 돌부처 이창호의 명불허전, 신의 한수구나!"같은 깨달음(...)을 얻어 미생을 그린게 아닙니다. 이건 윤태호 선생이 아니라 이창호 기사와 반상위를 수도 없이 다툰 유창혁 기사나 조국수께서도 못할 겁니다. 다만, 윤태호 작가는 바둑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주인공이 바둑세계에서 나올 수 밖에 없었지만 바둑을 완전히 버릴 수 없는 몸이고, 이 바둑이 마치 현실을 보여주는 것과 같은 모습에서 상당한 재미와 공감을 이끌어낼 따름입니다. 헌데 겨우 "영제가 안 태어났더라면"같이 큰 의미 없는, 그리고 실제로 기사들에게조차 그리 기억에 남지 않을 장면을 가지고 쓴 이런 손발이 오그라드는 글은 "장군님 축지법 쓰시는" 가사와 비슷한, 그런 종류의 글일 뿐입니다.
만약 정말로, 진짜 만에 하나라도 매화 시작마다 나오는 수에 미생의 전개와 밀접한 의미가 있다면 1부의 마지막은 어째서 응씨배의 결승대국을 다루지 않고 조치훈의 휠체어대국을 다루는지, 그리고 이 두 대국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있는지 설명이 가능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두 대국 사이에는 공통점을 찾을 수 없을 겁니다. 조국수의 응씨배 결승과 조치훈의 휠체어 대국의 공통점은 잘 봐야 현대바둑이 열린 이후 손에 꼽히는 "명승부"라는 사실 하나 뿐입니다. 그런데 미생과 포석단계에 있는 돌 한수한수를 매칭시킨다? 한마디로 좀 격하게 표현하자면 꿈보다 해몽이 좋고, 저기 고속버스터미널 역에 있는 사주팔자 보는 사람들처럼 헛소리를 지껄이는 것 밖에 안 됩니다. 여기에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면 워털루 전투와 청산리 대첩 사이에서 의미있는 공통점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상식 밖의 요상한 논지를 들어 "꿈보다 해몽이 좋은" 글들이 모여 있는 책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자기계발서 종류입니다. 자기계발서가 도움이 되는 분들께는 이런 "꿈보다 해몽이 좋은" 이야기에 귀 기울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솔직히 탐탁치 않은 건 사실입니다. 은하영웅전설에서 양 웬리가 승승장구하니 "양 웬리 리더쉽"이라는 책이 동맹 곳곳에서 유행하자 양 웬리가 "이뭐병"이라는 반응을 보이지요. 제가 보일 수 있는 반응도 양 웬리와 같습니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거지요. 잘 해봐야 공통점이라곤 "명승부"이며, 명승부에서 흔히 오는 쾌감인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대국에서 오는 전체적인 감동"만을 강조한게 아니라 인간의 세상사가 여기에 있다는 식과 등장인물의 행동을 엮는 건 누가봐도 무리숩니다.
결국 이런 글은 단순히 끼워맞추기에 불과한 그런 글입니다. 게다가 일반에게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바둑"을 제법 그럴듯이 포장하는 모양새를 볼작시면 환빠와 닮은 점도 있습니다. 이러한 행위에서 나온 댓글은 사실을 곡해하는 글일 뿐더러 다른 이에게 작품을 곡해하게 만드는 요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선무당이 사람잡듯이 이런 사이비 해설은 바둑에 있어 전혀 도움도 안 되고, 작품의 이해에는 더더욱 해를 끼치기에 이런 지뢰를 피해가는 지혜가 필요하지 않을까 합니다.